16일 추경 발표날은 내 98만원이 날아간 날
아무리 수당이라지만, 우리에겐 이미 ‘소득’
사전에 진지하게 상의했다면 반대했을까?
“힘 있는 기관은 빼고, 고생한 부처는 넣고”

지난 20일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안정섭 위원장과 이철수 우본공무원노조 위원장 등이 기획재정부 담당자를 만나서 연가보상비 삭감 관련, 항의를 하고 있다. 국공노 제공
지난 20일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안정섭 위원장과 이철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본공무원노조 위원장, 김충현 기획재정부 노조위원장 등이 기재부 담당자들을 만나서 연가보상비 삭감 관련, 항의를 하고 있다. 국공노 제공

나는 세종시에 있는 중앙부처 22호봉 6급 공무원이다.

지난 16일 아내와 나는 말다툼을 했다.

정부가 임시국무회의를 통해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쓸 9조 7000억원 규모의 ‘2020년도 제2회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확정한 날이다.

이날은 또 내가 유급 휴가를 안 가고 아끼면 받을 수 있는 98만여원이 날아간 날이기도 하다.

정부가 중앙부처 공무원 연가보상비(유급휴가비)를 전액 삭감해 긴급 재난지원금 재원으로 활용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연가 급식비 삭감 발표 날 아내와 싸웠다

아내는 “박봉인데 100만원 가까운 돈이 날아갔다”고 투덜댔다. 그런 아내를 보고, “일반 국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정도는 분담을 해도 된다”며 다독였다. 물론 아내는 수긍하지 못하고 계속 투덜댔다.

“그만 좀 하라”고 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나 역시 속은 쓰리고 화가 치민다.

삭감한 돈도 돈이지만, 진짜 기분 나쁜 것은 그 과정과 방식이다. 사전에 일언반구 얘기도 없이 기재부가 자기들 맘대로 삭감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건 무시다. 공무원을 국민의 일부나 객체가 아니라 정부의 소유물쯤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처사다.

지난 10일인가 한 신문이 공무원 연가보상비(유급휴가비)를 삭감해 긴급 재난지원금으로 쓴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획재정부는 즉각 “결정된 바 없으니 보도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해명자료를 냈다. 공직사회에는 바로 이 해명자료가 돌았다. “그러면 그렇지…”했다.

그런데 정부 발표는 그 보도 그대로였다.

매번 이런 식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뒤늦게 “미안하다”…협의체 구성은 묵묵부답

발표 이후 공무원 사회가 술렁이자 뒤늦게 지난 20일 인사혁신처와 기재부 등이 나서서 “미안하다”면서 앞으로는 협의를 하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화가 난다.

“너희가 별수 있겠냐.” 이런 의도가 엿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발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 같아서 또 울화통이 치민다.

연가보상비 삭감이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과 방식이 더 참을 수 없고, 기분이 나쁘다.

물론 연가보상비는 수당이어서 예산에 계상되지 않으면 안 줘도 문제는 없다고 한다. 삭감해서 예산이 없어졌으니 안 줘도 된다는 것이다. 누구는 대법원 판례까지 들먹인다.

하지만, 공무원에게, 특히 하급 공무원에게 연가보상비는 소득의 일부다. 이미 그렇게 인식돼왔다.

질본은 넣고, 국회·청와대는 빼고…징계받을 일

그런데 이것을 전액 삭감하면서 아무런 통보도, 협의도 없었다는 게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무원은 무시된다.

만약 정부가 공무원 노조 등을 상대로 이런 상의를 했다면 반대했을까. 나는 갈등은 좀 있었겠지만, 그래도 수용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나의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이 고통받는데 공무원이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절차는 모두 생략됐다.

절차와 과정 지켰으면 이런 실수 나왔을까

국가공무원노동조합에 문의하니 기재부 관계자가 “긴급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한 매체가 보도했을 때 결정된 바 없던 것이 그 전날 밤 갑자기 결정됐다는 것인지, 군색한 변명이다.

공무원도 생활인이고, 국민의 일부다. 그리고 양식도 있다. 공무원을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공무원 보수나 수당을 쌈짓돈쯤으로 여길 시대는 지났다.

안타깝게도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공무원이다. 다만, 우리보다는 생활형편이 나은 고위 공무원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나를 진짜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엉터리 기준이다. 청와대와 국회, 국가정보원, 국무조정실 등 34개 기관은 제외했다고 한다.

정작 코로나19 방역 주역 가운데 하나인 질병관리본부와 국립병원, 행정안전부 소속기관 등의 연가보상비는 삭감하면서 이들을 빼놓았다니 공무원은 물론 국민도 납득 못 할 기준을 들이민 것이다.

같은 공무원이지만, 창피하다

기재부는 국회 심사 및 통과가 불가피한 상황 등을 고려해 연가보상비 감액 부처를 최소화했으나, 국회 통과 즉시 예산집행지침 변경을 통해서 실제 집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해명했단다.

나 같은 하위직 공무원이 봐도 창피한 일이다. 힘 있는 기관은 빼고, 고생한 부처는 포함시키다니, 모든 게 꼼수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얻겠는가.

절차와 과정이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국가적, 국민적 위기 때에는 협의체든 기존의 보수위원회든 활용했으면 좋겠다. 공무원 노조와의 만남에서 이런 제의에 대해 기재부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위원회 좋아하는 정부가 왜 이런 문제에는 인색할까.

만약 협의 절차가 있었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은 무식하고, 우리는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중앙부처 한 공무원 N씨와 공무원노조, 기자의 취재를 바탕으로 작성된 기사다. 대다수 공무원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자신들도 뭔가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이번 연가보상비와 관련, 드러내놓고 반발은 못하지만, 안으로는 울화를 삭이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무시당했다는 서운함이 자리하고 있다.

김성곤 선임기자 gsgs@public25.com

저작권자 © 공생공사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