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주한미군 소방관 딸 아버지 보관 사진 보내와
아버지 유품 정리 중 귀중한 사진 10여 점 발견
1964~65년 함께 일한 동료들 보고 싶어했어요”
소방청, 당시 소방대 동료 등 찾는데 도움주기로

페이 쉘라씨(왼쪽)가 한국인 소방관과 함께 기와지붕 위에서 소방호스로 불을 끄고 있다. 소방청 제공
페이 쉘라씨(왼쪽)가 한국인 소방관과 함께 기와지붕 위에서 소방호스로 불을 끄고 있다. 소방청 제공

1960년대 어느 날 대구의 한옥 기와지붕에 미국인 소방관과 한국인 보조원이 불이 난 기와지붕에 앉아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린다.

불이 나면 양동이를 들고 나와 긴 줄을 서서 물이 담긴 양동이를 나르고, 이 물을 뿌려 불을 끄던 한국인들에게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1964년 주한 미군 소방관으로 대구에서 2년 동안 근무했던 페이 쉘라(Fay Shalla·2020년 작고·남)씨다.

사진이 공개된 것은 페이 쉘라 씨의 딸인 크리스티 쉘라(Kristi Shalla·여·45)가 올해 초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인 당시 근무 사진 10장을 전자우편으로 소방청에 보내왔기 때문이다. 소방청은 이 사진들을 17일 언론에 공개했다.

페이 쉘라씨가 생전에 만나고 싶어했던 한국인 동료들. 소방청 제공
페이 쉘라씨가 생전에 만나고 싶어했던 한국인 동료.
소방청 제공

크리스티 쉘라씨는 “아버지는 대구에서 한국인 동료와 현장에 출동해 화재를 진압했던 경험을 비롯해 2년 동안의 한국 생활을 늘 그리워했으며 한국 어린이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가족들에게 자주 들려줬다”고 전했다.

당시 미군기지 주변에 살던 어린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린이들이 말했던 ‘아이스께끼’(ice-cakie)라는 단어를 가족들이 기억하고 있을 만큼 어린이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 쉘라씨에 따르면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앞장섰던 아버지는 1966년 허리가 아파 소방관을 퇴직한 후에 농무부(USDA) 식품영양국에서 푸드 스탬프(Food Stamp) 지급을 승인하는 업무 등을 했다고 한다.

이후 2000년까지 공무원으로 일을 하다가 퇴직했으며 올해 초 별세했는데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소방관으로 일했던 당시의 사진을 발견해 이를 전하겠다고 맘을 먹었다는 것이다.

특히 고(故) 페이 쉘라씨는 생전에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한국과 당시에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동료들을 만나 볼 수 있기를 원해 수소문을 했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소방청 관계자는 당시의 한국인 동료가 80대 이상의 고령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언론은 물론 미8군 소방대의 협조를 얻어 사진 속의 사람들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티 쉘라씨는 스마트시티 건설과 관련된 컨설턴트로 한국의 기관과도 일을 함께해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으며 현재 워싱턴DC에 거주하고 있다.

생전의 페이 쉘라(오른 쪽)씨와 그의 딸 크리스티 쉘라. 소방청 제공
생전의 페이 쉘라(오른 쪽)씨와 그의 딸 크리스티 쉘라.
소방청 제공

한편,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미국의 소방장비와 시스템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주한 미8군의 각 지역 캠프마다 설치된 소방대는 우리나라 현대 소방발전사에서 긴밀한 관련이 있다.

미군정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소방이 서양식 제도와 장비를 도입하는데 전환점이 되었고 한국 소방이 선진화된 소방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기도 했다.

당시 미군 부대 내의 소방대는 화재가 나면 지원 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상호 간 협약을 통해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활동을 하고 있다.

김성곤 선임기자 gsgs@public2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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