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9)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가끔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을 보면 내가 아이를 키운 흔적이 보인다. 예쁜 드레스와 세일러문 머리띠에 공주 미소를 띤 사진 따윈 없다.

짧은 커트 머리에 동네 시장에서 산 바지, 신발. 빨아 입히기 쉬운 소재의 옷을 입은 꼬맹이가 수줍게 웃고 있다. 남에게 물려줄 만한 아까운 옷 하나 없다. 그나마 나의 이런 무심함에 어머니가 나서서 이런저런 입성을 챙긴 것이 이 정도였다.

한참 자라고 나서 자신의 입성 수준을 눈치 챈 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나를 아무렇게나 키웠어? 예쁜 옷도 못 입어보고, 이게 뭐야? 남자처럼, 창피하게!”

육아독박을 해 주신 친정어머니와 가사 분담을 해준 남편 덕에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흔히들 엄마 숙제라고 하는 초등숙제와 준비물을 챙기는 것은 짐짓 무심했다. 과제를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사교육도 뒤늦게 따라가는 편이였다. 급기야 뒤처짐을 걱정하신 어머니가 어느 날 ‘XX펜’과 ‘X선생 영어’를 불러들였다. 그러다 보니 초등 때 아이는 학급에서 조용하고 평범했다. 게다가 딸 가진 엄마들의 아이 꾸미기도 없었으니 외려 주위에서 걱정을 했다. 아이 기죽는다고.

어머니와 꽉 붙어사느라 이사도 자주 했고 아이는 3곳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극적인 아이는 그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마지막 전학을 앞두고 아이는 바뀌는 학교와 또 한 번의 친구 사귀기에 자신 없어 하며 울먹였다.

나는 아이에게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 역시 3번의 전학을 하였고 그때마다 이미지를 초기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즐겼다. 새로운 학교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니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어떤 아이로 새로 태어나고 싶으냐고.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간 학교에서 아이는 변신에 성공했다.

6학년 첫 시험을 앞둔 때였다. 아이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번 시험을 위해 인생 최대의 노력을 해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자고 했다. 그 시험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상위권에 진입했다. 한 번의 성공을 맛본 아이는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푸닥거리는 있었다. 6학년 말이 되자 이것저것 학원 수가 늘어났고 숙제를 안 해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나는 모든 학원과 학습지를 중단했다. 아이는 뒤처지는 불안감을 스스로 견디지 못했고 석 달 만에 몰래 학원을 원상복귀시켰다. 할머니에게는 나중에 학원비를 꼭 갚겠다고 약속했단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중2 때였다. 반항의 시절이었다. 저녁에 퇴근하면 나의 화장품들이 제자리를 이탈해 있었다. 어쩌다 일찍 퇴근하던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왠지 낮 익은 여학생이 마주 오고 있었다. 마스카라를 떡칠한 그녀가 나의 아이임을 알아차리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종종 학원도 빼먹는다는 사실도 들려왔다.

나는 다시 아이를 마주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다. 당시 동방신기 그룹에 푹 빠져 있던 아이는 백댄서가 꿈이라 했다. 학원을 몇 개 정리하고 주말마다 댄스 학원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 생활은 한 달도 안 되어 끝났다. 몇 번의 교습 후 기가 죽은 아이는 자신은 춤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포기했다.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아이는 별 수 없이 책상에 다시 앉았다. 나는 공부는 차선의 선택이고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언제든지 다시 하자고 했다.

그 뒤로 아이는 간혹 분출하는 에너지를 쏟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지지해주는 준비와 시스템이 부족했다. 부모로서 나 또한 그런 면에서 깨어 있거나 앞서 가질 못했다. 결국 공부였다.

워킹맘에 교육열, 아니 학원열이 부족한 엄마를 둔 탓에 아이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들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는 워킹맘을 대신해 아이는 그룹과외에 끼기 위해 사교성을 키워갔다. 아이가 정보를 얻고 내게 요청하면 과외비를 송금하였다.

이후 아이는 대입을 위한 길고 험난한 정글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갔다. 엄마의 정보수집 부분도 스스로 감당하면서 말이다. 대입에 성공한 후 툭 던진 아이의 말에서 그 고단함이 배어 나왔다. “나는 잡초처럼 컸다고~”

아이는 지나치게 독립적이 되었다. 문과를 선택한 것도 뒤늦게 알았다. 가고 싶은 대학도 홀로 선택했다. 고2 때 이미 그 대학을 다녀왔고 고3 시작하자 입학식날 다시 그 대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혼잡한 입학식날 기쁨과 축하로 떠들썩한 교정을 바라보며 아이는 무엇을 상상했을까?

고교 생활 내내 그 대학의 로고가 새겨진 공책, 열쇠고리, 책갈피 등이 방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컴퓨터 상단에 ‘가자 xx대학교’가 붙어 있었고, 로그인 ID도 그 학교 이름이었다. 아이는 내내 그 학교에 입학하여 생활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며 다녔다.

대학 원서 쓸 무렵 다른 대학으로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아이는 확고했다. 아차! 고등학교 입학하며 건네준 책 ‘시크릿’의 영향이 작용했음을 후에 알았다. 그 책의 핵심인 열망하는 것에 대한 끌어당김, 시각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고3 여름 어느 날 입시정보가 부족한 것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틀을 휴가 내고 대학입시 전형을 열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뿔싸! 수시입학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종류가 많은지는 몰랐다.

더구나 수시준비는 최소 1, 2년 전에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엄마의 무지가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운명을 가른다는 데…. 다급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태연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정시에 집중했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결정해 갔다. 엄마의 선제적인 정보를 기대할 수 없었고, 요청을 하면 수용하되 과정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몇 차례 경험했기에 스스로 찾아 요청했고, 요청한 것은 열심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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