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인의 좌충우돌 사회적응기(31)

이서인 시인·재향군인회여성회 회장
이서인 시인·재향군인회여성회 회장

9월 26일,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질 계획이다.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이지만 추석연휴를 고려하여 9월 26일로 앞당겨 실시하는 것이다. 6·25전쟁 시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한 것과 육해공군의 창설일을 통합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되었다. 여군의 태동 또한 6·25전쟁 시에 창설되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행사의 품격  

지난 9월 6일, 여군 창설 제73주년 기념행사가 공군호텔에서 거행되었다. 지난해에는 행사에서 여군 약사를 소개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번 행사는 재향군인회여성회 회장의 직책을 가지고 참석한 행사라 감회가 남달랐다. 모든 행사에는 내빈과 참석자가 가장 중요한데 행사의 성격이 참석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군 창설 기념행사에 과연 누구를 초대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꼭 모시고 싶은 분들이 생각났다. 가장 먼저 모교의 여학도병과 여자의용군 6·25참전 선배들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초대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세가 많으셔서 일부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또 다른 분은 다쳐서 거동이 힘들거나 남편의 병수발로 인해 참석이 어렵다는 답신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어느덧 그분들의 연세가 90세 전후가 된 것이다. 

정말 이제는 이러한 행사에 모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 초대한 분 가운데 열 분이 행사 초대에 응해 주셨다. 안상정, 최선분, 손태순, 이점례, 권경렬, 조영희, 김영수 님은 참전 여군이었고 박찬옥, 신현재, 김순덕 님은 간호 장교 출신 이었다. 나는 축사를 통해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소개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연약한 여성의 몸이지만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외면하지 않고 위국헌신한 6·25참전 여군 선배님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 자리에서 잠깐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선배님들을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비역과 현역, 그리고 향군여성회 임원들 모두 열렬하게 환영의 박수를 쳤고 선배님들은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로 답했다. 언제까지 이분들의 미소를 마주 대할 수 있을까.

한 발짝 앞서갔던 사람들   

이날 행사에 참석한 6·25 참전 여군 중 여자의용군 1기인 이점례(91), 여자의용군 3기 동기생인 최선분(88), 조영희(87), 권경열(87)님이 3년 전 모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여성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우리는 한 발짝 앞서갔던 사람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육군은 1950년 11월 24일 정훈대대를 창설했다. 장교로 임관한 이점례님은 정훈2대대에 배치받아 강원과 경북 등에서 대적활동을 수행했다. 경북 안동에서 사범학교를 다녔던 그는 “북한군을 피해 머슴 차림을 하고 찾아간 영천의 군부대에서 여자의용군 1기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1950년 9월 창설된 여자의용군 1기 모집에만 8000명이 지원했다. 어머니도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게 낫다며 가라고 말씀하셨다. (중략) 내가 죽는 날까지 적군을 한 명이라도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혹독한 훈련을 견뎠다”고 했다. 

최선분님은 “평화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18세 때 서울 종로2가의 병사구사령부(현 병무청)를 직접 찾았다. 한마을에 살던 이웃이 바로 눈앞에서 총살을 당했고 어제까지 공부하던 학교는 무너져 내렸다. 피란길에서 폭탄에 깔린 사람도 마주해야 했다” 고 했다. 권경열님은 “군복이 없어서 미군한테 받은 걸 입다 보니 동복은 길이가 발등까지 닿았고, 신발도 내 발보다 훨씬 컸다”고 훈련소 시절을 회고했다.

조영희님은 “6·25전쟁 중 강원 양구, 화천 근처 전방에서 대북 방송을 했다. 학교에서 웅변을 했던 실력을 밑천 삼아 대본도 직접 썼다. 대적선전대에서 대북심리방송을 했는데 전장에서 직접 목도한 전쟁의 참혹함이 현재에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아울러 “싸움이 너무 치열할 때는 약간 물러나 야전병원에 피란가 있기도 했는데 아비규환이었다”며 “의료 기술은 없지만 도울 수 있는 건 돕자고 해서 하다못해 빨래라도 했다”고 증언했다.

자발적으로 참전한 3000여 명의 여군이 있었다 

6·25 전쟁에는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군번 없이 참전한 여성과 간호 장교까지, 여성 군인이 있었다. 6·25 참전 유공자 발굴 사업을 통해 등록된 현황을 살펴보면 6·25 참전 여군은 2554명에 달한다.

지난 9월 17일 6·25 참전 간호장교인 고(故) 박옥선님의 영결식이 있었다. 여군 창설 73주년 행사에서 여군소개 영상에도 나온 터라 소식을 접하고는 가슴이 먹먹했다. 고인은 1951년, 18살의 나이에 간호장교로 자원하여 참혹한 전쟁통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헌신했다. 그는 “참전한 것을 후회 안 합니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부르면 달려가서 일할 것”이라며 생전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오랜 기간 참전 여군의 공적은 잊힌 채로 남아있고 일부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참전 여군의 공적을 발굴하여 알리고 남아 계신 분들에게 예우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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