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인의 좌충우돌 사회적응기(30)

이서인(재향군인회여성회 회장)
이서인(재향군인회여성회 회장)

지난달 6·25 73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이 각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중 한 매체의 유튜브 방송은 현재 접속횟수가 120만 회를 기록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당일 행사장에서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옆에 앉은 6·25 참전용사에게 받은 쪽지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쪽지에는 “KLO가 인정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지난 2월엔 보상금도 받았고 6월 14일엔 청와대 오찬에도 초청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73년이 지났는데 왜 이제야 보훈이 이루어진 걸까?

누가 감사한 일인가 

‘켈로부대’(KLO·Korea Liaison Office) 출신 이창건 전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다니다가 켈로부대의 기획 참모로 참전했다. 켈로부대는 미군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6월 조직한 비정규 북파공작 첩보부대다. 미군 8240부대와 연계해 6·25전쟁 중 비밀작전을 수행했으나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 군적이 없어 그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2021년에 와서야 ‘6·25 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공포되며 정부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고, 작년 2월부터 국방부는 비정규군 공로자들에게 공로금을 지급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날 이창건옹은 “북한에 침투했다가 휴전 때문에 못 돌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덧붙였다. 한동훈 장관은 “말씀 잘 기억하고 편지 집무실에 걸어두겠다”고 답했고 실제 집무실에 쪽지를 걸어 놓은 것이 추가 보도되어 감동을 더했다. 군번도 이름도 없이 국가에 헌신한 이들의 공로가 너무 늦게 조명되고 있는 사실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켈로부대에는 여성 전투원도 있었다 

켈로부대 용사의 가슴 아픈 인생 스토리가 과연 이창건 옹만의 이야기일까?

지난 6월 26일 아침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저 켈로부대 이영철입니다. 그동안 많이 도와주신 결과 드디어 정부로부터 참전유공자로 인정을 받게 됐어요. 고마워서 연락했어요.” 

이영철 옹과의 인연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육군본부에서 부이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정책홍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마침 한 방송사에서 8·15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여군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고 각 군과의 협조가 필요하여 방송제작에 관여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카의 비밀결사대’는 6·25 당시 ‘여군 비밀첩보부대’에 관한 활약상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5개월에 달하는 취재 기간에 이어 치밀한 기획 과정 끝에 방송되어 지금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전설처럼 소문만 무성했던 여성 비밀첩보대원의 기록을 담아내며 눈길을 끌었다. 켈로부대에서 양성된 3000여 명의 비밀첩보대원 10명 중 3명은 여성대원이었고 이들을 가리켜 ‘레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여성 켈로부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 분이 바로 이영철옹이다. 그는 켈로부대의 교육대장이었다. 이영철옹에 의하면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를 얻어야 하는데 남자요원만 가면 의심을 받기 쉬워서 부부로 위장하기 위해 여성대원이 반드시 필요했고 어떨 때는 여성 대원들이 더욱 용감하게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마침 미국에서 6·25전쟁사 연구를 하고 있던 후배의 도움으로 제작진과 같이 해제된 기밀문서를 찾아내서 만들어진 ‘프란체스카의 비밀결사대’는 ‘인천상륙작전’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작전 성공을 위해 켈로부대원들이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주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남은 자의 의무와 책임     

사실 이영철옹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날은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한 하루였다. 긴 고민 끝에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으로 출마하여 선거가 치러지는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2주간의 선거유세 마지막 날이라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지만 전화를 받고 쉽게 끓을 수가 없던 이유는 감사하다는 음성에 뒤이은 한마디였다. “정부로부터 보상은 받았지만, 아직 무공훈장을 받지 못했어요. 여기저기 물어봐도 답을 얻을 수가 없네요.” 

유권자들에게 표를 얻기 위한 전화통화가 급했지만, 먼저 국방부와 육군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었는데 별 소득이 없었다. 이어서 빛의 속도로 인터넷에서 ‘무공훈장 서훈’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국방부에서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배너가 있어서 이영철옹의 아드님께 관련부서 번호와 배너 주소를 알려 드렸다. 다음날 나는 재향군인회여성회장으로 당선되었고 며칠 후 아드님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님이 축하난을 꼭 보내드리라고 합니다.”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그는 그래야 아버님 마음이 편안하실 거라고 했고 지금 사무실에 놓인 축하난을 볼 때마다 이영철옹을 떠올린다. 

7년 전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이영철옹은 9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으로 6·25전쟁의 실상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영철 옹의 애환을 담은 에세이가 다음 달에 발간된다고 한다. 출판기념회에 꼭 오라고 초청해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그분의 연세가 어느덧 99세. 어쩌면 나에게 향군여성회 회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진 이유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선후배 군인들과 남겨진 가족에게 봉사하라는 켈로용사의 유훈 같기도 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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