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인의 좌충우돌 사회적응기(28)

이서인 시인(여자 정훈장교 1기)
이서인 시인(여자 정훈장교 1기)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말처럼 지난 3년간의 봄이 그러했다. 봄이 와서 꽃이 지천으로 피어났어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고사하고 코로나19 감염병 예방대책으로 인해 꽃구경이라는 말이 생소할 정도로 우리의 눈과 발은 집안에 묶여 있었다. 지난주 오랜만에 태안으로 꽃 구경을 다녀온 후 내가 보는 찰나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는 수십 년간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숲과 꽃을 가꾼 사람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목련 꽃그늘 아래서  

불칸, 매그스 피루엣, 선라이즈, 클레오파트라, 트리베 홀먼, 사라스 페이보릿, 제인 플랫, 사요날. 누구의 이름일까? 

천리포 수목원을 방문하여 이러한 목련의 이름을 알기 전까지 세상에는 백목련과 가끔씩 보이는 자목련만 있는 줄 알았다. 세계 최다 목련 식물 종을 보유한 천리포수목원은 목련만 871 분류군을 수집해 국제적인 수준을 자랑하며 특별히 축제 시기에만 비밀의 정원을 공개한다.

목련을 주제로 하는 봄꽃 축제는 국내에서 천리포수목원이 유일하다. 여고 동문과 함께 천리포수목원을 찾은 것은 마침 ‘목련 필(Feel) 무렵’을 주제로 2023년 제6회 목련축제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리포 바다와 맞닿은 수목원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내륙보다 목련이 천천히 개화하여 4월에 만개하는 노란색, 붉은색, 흰색으로 다양하게 핀 목련을 감상하기 좋은 시기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어온 사람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그는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를 한 고(故) 민병갈(Carl Ferris Miller) 박사다. 충남 태안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은 한국 최초의 사립 수목원으로 민병갈 박사가 6·25 전쟁 후에 사재를 들여 매입한 토지에 197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수목을 식재하기 시작하여 40년 동안 16,0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식물을 심고 관리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2002년 4월 운명하는 그날까지도 자신이 사랑하는 수목원의 수목들이 잘 자라기를 간절히 바란 그의 바람대로 아름다운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 그늘 아래서 우리 동문들은 ‘4월의 노래’를 합창하며 그의 넋을 기렸다.  

20년 숲 가꾸기 힐링이 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내 집은 아니나 힐링이 필요할 때 찾아갈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있는 친구를 만나라고. 얼마 전에 바로 그런 장소를 만났다.  

요즈음 어느 곳을 가든지 넘쳐나는 것이 카페다. 멋진 풍광과 더불어 맛있는 베이커리를 파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그 카페는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단순히 커피와 빵만 파는 곳이 아니라 산책로를 따라 가면 다양한 숲길을 만날 수 있다.

우리 국민과 가장 친숙한 나무인 소나무 숲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메타세콰이어 숲길, 마치 러시아의 시골길을 걷고 있는듯한 자작나무 숲길이 산책로를 따라 펼쳐져 숨 쉴 때마다 자연의 냄새가 코를 스친다. 나무 사이에는 철마다 볼 수 있는 꽃을 심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내가 카페를 찾았을 때는 수선화와 튤립이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많은 이의 힐링 장소가 된 카페의 주인은 여고 동창의 동생이다. 20년 전에 땅을 사서 그동안 부부가 숲을 부지런히 가꾸어 왔다고 한다. 얼마 전 까지는 가족만의 힐링 장소였으나 이곳에 카페를 지으면서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어 숲길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주인장의 특별한 안내로 우리 동창들은 피톤치드 가득한 산책로를 걸었다. “고맙다 친구야. 고향을 찾는 또 하나의 기쁨을 제공해줘서.” 

디테일의 힘

‘우두동동 우두두두동 그 두 번째 이야기’ 고향 친구의 그림 전시회 제목으로 2021년 7월 첫 번째 전시회 이후 두 번째 전시회다. 춘천의 자그마한 동네 도서관에서 전시된 그의 작품은 세필로 그린 수채화 펜드로잉화이다. 우두동 주민이기도한 친구는 언젠가는 개발에 밀려 사라질지도 모르는 정겨운 동네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는 춘천에서 30년 동안 출판사를 경영해 왔다. 1993년 시작한 출판사는 그동안 강원도의 역사, 인물, 학술 분야 도서와 ‘인문학 산책’ 시리즈인 ‘관동 800리 인문기행’·‘오대산 한시를 만나다’·‘해파랑길 몽돌소리’·‘강원학 지식 총서’ 등을 꾸준히 발행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방출판사로서는 드믈게 ‘2021년 한국출판학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년 전부터 우두동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소박한 집과 나무, 밭의 풍경, 그리고 동네를 감싸고 흐르는 소양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친구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지붕의 기왓장 한 장, 담장 한 자락, 나뭇잎 한 장, 꽃잎 한 겹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마치 그 동네를 가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디테일의 힘이다. 

꽃도 나무도 사람도 역사도 저절로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수십 년 전 누군가가 심고 가꾸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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