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24)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공생공사닷컴DB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공생공사닷컴DB

34년의 회사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했다.  먼저 제대한 남편은 이제는 같이 놀 수 있다며 기대에 찬 눈치였다. 

그동안은 남편과 같이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하루 두세 시간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24시간 붙어 있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큰 변화였다.

퇴직 직전 시작된 팬데믹으로 고대했던 여행도 불가능했다. 퇴직 후 반짝 찾아오는 두 번째 허니문도 없던 것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면서 편안함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간 서로 얼핏 봤던 모습들이 코앞에서 보였다. 

아니, 이제 퇴직해 쉬려 하는데 끼니는 왜 나만 준비하나? 생각보다 게으르네.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저 여자는 잠도 없나? 출근도 안 하는데 뭐 그리 일찍 일어나 부스럭 거리나? 식사는 단골 도시락집 가서 해결하면 되는데 부엌에서 부산을 떠나? 

그러다 정확히 석 달 만에 꽝! 하고 부딪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촉발의 원인이 흐릿하다. 그런데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30년간의 해묵은 레퍼토리가 쏟아져 나왔다. 감정이 증폭되니 해서는 안 될 말도 오고 갔고 해서는 안 될 생각도 했다.

남자의 퇴직도 다르지 않다. 열심히 일하고 퇴직 한 남편을 맞은 아내. 함께 브런치도 먹고 드라이브도 하고 국내외 여행도 했다. 이게 사는 거구나 싶은 남편은 오랜만에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내가 어렵게 입을 뗀다.

“여보. 석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 그만해도 될까? 언제까지 해야 돼?”

쩝~~ 남편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왠지 모를 서러움이 몰려온다. 아내의 생활에 나는 방해꾼이었구나! 더 큰 외로움이 몰려온다.

이건 그래도 웃픈 케이스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퇴직 전부터 부인의 방어가 시작된다. 어떻게 24시간을 같이 있어야 하나? 삼식이 남편은 노! 나의 일주일 스케줄은 빠듯하다. 동네 친구들과 브런치, 센터에서 댄스교습에 동창들과 철마다 여행도 가야 하는데.

이 경우 남편의 퇴직은 아내의 일상에 쓰나미다. 

퇴직 후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은 엄청난 일상의 변화이다. 30여 년 고단한 삶에서 돌아온 그, 그녀를 위해 노란 손수건을 휘날려야 하는데 오히려 사방에 빨간 불이 켜진다. 

남편 또한 아내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집안의 일들이 어쩐지 질서와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다. 잔소리가 시작된다.

지적이 싸움이 되고 싸움이 미움이 될 무렵 부부들은 나름의 평화를 추구한다. 그것은 무기한의 휴전과 타협이다. 공동의 일에는 협조하되 각자 길을 간다. 밖에서 보면 아무 문제없는 가정이다. 

이럴 순 없다. 30여 년 만에 비로소 찐 만남을 시작되는데!  

나 역시 퇴직 후 석 달을 못 갔다. 집안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타협보다 직면을 선택했다. 비폭력 대화(NVC: Nonviolent Communication)가 떠올랐다.

먼저 결혼생활 30년을 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단계로 그간 상대의 습관과 언어에서 거슬리는 점을 적어 보기로 했다. 막상 교환하니 생각지도 못한 말과 행동에서 서로 상처를 받고 있었다. 치사해서 표현만 못 했을 뿐.

다음 단계로 그 말과 행동이 왜 나를 화나게 했는지, 나의 욕구의 어떤 점을 건드렸는지를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무시당했다는 느낌과 이해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었다.

다음으로 서로 요구할 것과 수용할 것,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의 의도가 비난보다는 그저 무의식적인 패턴이란 사실과 내가 과도한 반응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오해는 줄어들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기분이 상했을 때는 묵혀 두었다 폭발하지 말고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도 감정이 격해지면? 룰을 정했다. 일단 집을 벗어나 동네 카페로 향한다. 마주앉아 각 3분씩 돌아가며 발언을 하고 상대는 절대 끼어들지 않는다. 

상대의 말이 끝나면 그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여 되돌려준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벗어난 일방적인 해석이라면 다시 정정해 준다. 그리고는 각자의 감정과 요구사항을 말한다. 장소를 옮기는 시간에, 순서를 지켜야 하는 대화에 어느덧 흥분은 가라앉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한 이불 속에서 잔다. 적어도 석 달에 한 번씩 가벼운 나들이, 여행을 하며 서로 쌓여 있는 것은 없는지 묻고 털어 버리는 시간을 갖는다.

덧붙여서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시로 신념과 가치를 떠드는 나와 달리 진지한 이야기는 사절이었던 남편은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을 이야기했다. 각자의 꿈을 존중하고 응원하기로 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보다 관계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언과 방법이 쏟아지는가?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도 그렇게 노력하는데 왜 가장 소중한 짝꿍과 관계에는 소홀한가? 

부부관계는 적어도 10년마다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 아파트만 리모델링하고 회사만 결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고 솔직히 요구하고 상대에게 귀 기울이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패턴을 알아차리고 멈추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자.

물론 아내와의 언쟁에서 이긴 적이 없는 남편을 테이블에 앉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며 눈시울을 붉힐 때 즈음이면 가능성이 커진다. 잘 설득하자. 

부부는 삶에서 어떤 존재인가? 

데이비드 브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남녀관계를 3단계로 설명한다. 서로에게 콩깍지가 끼는 이상화 단계, 콩깍지가 벗겨지며 밥 먹는 것도 꼴 보기 싫어지는 극단화 단계, 여기서 헤어지면 연인은 이별이고 부부는 이혼이다. 

그러나 극단화를 넘어서면 서로의 참모습을 사랑하고 수용하는 통합화 단계에 들어선다.

결혼했다 함은 통합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통합화 단계에 들어섰다 해서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통합화의 길은 극단화로 퇴보했다가 다시 통합화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배우자의 퇴직은 극단화와 통합화의 갈림길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결혼생활의 유지를 위해 참고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더라도 통합화의 길로 갈 것인가? 

모든 관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부부관계’는 결혼식장에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가도 뒷걸음치기도 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도 같다.

우리의 푸닥거리는 석 달이 걸렸다. 30년 숙제를 한꺼번에 하려 하니 시간이 좀 걸렸다. 이번 달도 남편과 마주 보며 서로 묻는다. “우리 잘 가고 있나요?”

후배님들이여! 10년에 한 번씩은 부부관계 리모델링을 하자. 자주 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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