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13) ‘키예프에서 마주한 위기’

키예프는 낮보다 밤이 더 멋지다. 버스킹을 구경하고 영화 세트장 같은 도심을 쏘다니며 구경했다.  지공거사 안정훈 제공
키예프는 낮보다 밤이 더 멋지다. 버스킹을 구경하고 영화 세트장 같은 도심을 쏘다니며 구경했다. 지공거사 안정훈 제공

보이스톡 덕분에 위기에서 탈출하다

문득 낮에 키에프 공항에 내리자마자 현지 유심카드를 구입해서 넣었기 때문에 인터넷이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휴대전화기를 꺼내 확인하니 다행히 눈금이 몇 줄 뜬다.

그래서 바로 보이스톡으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지금 새벽 시간이겠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지 않아 애가 탔다. 두 번째 건 전화의 신호가 길게 울리고 나서야 막 잠에서 깨어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스톡을 화상 통화로 바꾸어 봤다. 다행히 화면을 통해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나는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내가 안전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끊지 말고 계속 통화하자”고 말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택시 안을 보여주었다. 특히 운전기사 옆 좌석 앞면에 붙어 있는 택시 번호와 전화번호를 근접해서 비추었다. 기사의 뒷모습과 옆 얼굴도 찍었다.

사실 택시가 산길을 달리고 있어서 많이 흔들리는데다가 차 안이 어두워서 피사체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택시 기사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어야 위험한 행동을 포기할 것 같아 깜깜이 촬영을 계속했다.

아내는 겁먹은 목소리로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지만 어두운 산속이라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가 더 좁은 길로 들어서더니 막다른 곳에서 멈춰 섰다. 전조등이 비추는 곳에는 문이 굳게 닫힌 목조 폐가가 하나 보였다. 문에는 커다란 폐목 두 개가 엑스자로 박해있었다. 건물이 많이 낡았고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걸 보니 오랫동안 버려둔 빈집인 것 같았다.

아마 악덕 기사가 범행 장소로 점찍어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솟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내의 겁 먹은 목소리 그러나 내겐 큰 힘이 되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침착해지자!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동시에 빛의 속도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기사가 범행을 하려면 차문을 열고 내려서 뒷좌석 쪽으로 걸어올 것이다.

그때 나는 반대쪽 문을 열고 뛰어내려서 왔던 길쪽으로 달아나면 된다. 인상은 험악하게 생겼지만 배가 남산만하게 나와서 나를 쫓아와도 잡지 못할 것이다.

도망칠 때 큰 소리를 질러서 놀라게 만들자. 만약에 붙잡혀서 엉키면 덩치나 힘에서 내가 불리하니 낭심이나 눈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등등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오케이, 여기는 내가 오려던 곳이 아니다. 다시 나가자.

그 대신 나가는 택시비를 더 주겠다”라고 알아듣든 말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니 손가락으로. 돈을 세는 제스추어를 써가며 보디랭귀지 신공을 발휘하면서 반응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택시 기사는 차를 후진하더니 오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 휴대전화기로 통화하고 택시 내부를 찍자 범행을 포기한 것 같았다.

키예프에서 오데사로 가는 기차 안 좌석. 안정훈 제공
키예프에서 오데사로 가는 기차 안 좌석. 안정훈 제공

온몸은 팽팽하게 긴장이 됐지만, 아내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는 게 큰 힘이 되었다. 아직 위기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제법 마음의 안정이 회복되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대응 방법도 달라져야 했다. 일이 벌어지면 일단 차를 세울 것이다. 그러면 바로 뒷좌석 문을 열고 뛰쳐나갈 수 있게 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입으로는 통화를 하고, 눈으로는 기사를 감시하고, 머리로는 대응방법을 생각하고,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더듬어 찾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한참을 가다보니 4차선의 밝은 길이 나왔다. 내 평생에 가장 긴 시간이 흘렀다. 환한 가로등 불 사이로 유스호스텔 간판과 건물이 보였다. 버스를 기다리는지 입구 승강장에 현지인 두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스톱! 스톱!”을 외쳤다. “여기야! 여기! 여기서 내려 줘!” 차가 멈추자, 나는 운전기사를 주시하며 일부러 여유 있는 척하며 천천히 내렸다.

그리곤 열린 차 창문으로 딱 250흐리브냐를 꺼내서 던져주고 사람들이 서 있는 곳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운전기사가 창문을 열고 뭐라고 큰소리로 떠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택시가 떠나가 버리고 나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겁먹지 않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다.

여행 운이 따라준다고 자만하고 있던 나에게 처음으로 닥친 위험한 순간이었다. 낮에 키예프의 보리스필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도움을 받은 여성 덕분에 우크라이나의 첫인상이 너무 좋아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모두가 착하고 친절하다고 믿어 버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가 “절대 길에서 잡는 일반 택시는 타지 말고 우버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았다. 우버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냥 흘려듣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세상의 반은 착하고, 반은 사악하다’는 사실을 잠시 깜박했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착한 사람들만 만났지만, 앞으로는 또 다른 절반의 나쁜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좋은 일이 많았으니 나쁜 일도 많을 것이다. 심기일전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

인생도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크게 성장하듯, 여행도 역경을 잘 극복 해야만 업그레이드 된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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