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문명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전적으로 문명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의미하며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 흔히 문화를 정신·지적인 발전으로, 문명을 물질적·기술적인 발전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그리 엄밀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시대의 가장 문명국은 어디일까? 당연히 미국을 엄지척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국내총생산(GDP) 1위 국가로 선진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적으로도 발전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돈이나 기술로만 따지기는 ‘무엇’ 한 사연이 있다. 바로 제일의 문명국이기는 하지만 정신이나 사상적으로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이후에 대두한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감성, 이성, 지성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지성이 미국 사회에서 홀대받게 된 배경에는 미국인의 의식의 뿌리에 박힌 복음주의와 원시주의, 그리고 지성의 비실용성이 한몫을 하고 있다.

사상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정서, 학설이나 교의에 대한 멸시, 사상을 닦는 것에 대한 경멸, 감정에 호소하는 힘이 있는 인간을 사상가보다 중시하는 태도 등은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미국 근대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이다. 그리고 미국의 보통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문학이나 학문 없이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말, 미국 경제와 사회의 발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앞선 수십 년 동안 구축된 거대한 권력들을 조정하려는 기운이다.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더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전문가가 필요해진 것이다. 지식인은 일부는 전문가로서, 또 다른 일부는 사회 비판자로서 미국 정계의 중심적 지위에 복귀했다. 지성의 복귀는 그것이 보수적인 입장을 지키는 데 유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변혁을 추진할 힘이 그것을 다시 호출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뉴딜 복지 국가나 루스벨트 두뇌위원회의 전조였던 셈이다. 권력투쟁의 장에서 혁신주의가 거둔 성과는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고 지성의 지평은 점점 넓어졌다. 마침내 상층부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최근 75년 동안 미국의 대다수 지식인은 기업을 지성의 숙적으로 낙인찍어 왔다. 확실히 기업가 기질과 지식인 기질 사이에는 모종의 불협화음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반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 문화는 학문이나 예술의 후원자인 소수의 부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 이 점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기업은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강하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하는 분야이지만 기업가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가장 강력한 반지성주의 세력이었다.

1950년대에는 대중 사이에서 반지성주의가 확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이유로 가장 격렬하게 공격당했던 이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그들은 매카시 상원의원과 그 일당이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온 가치관을 허물어뜨리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과거의 미국적 가치 속에 무언가 귀중한 것이 들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미국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로부터 차단되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왔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과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지적 분별력을 상실할 위험이 상존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반지성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사회학자 강준만은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반지성주의를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적용하는 가치중립적 개념이자 특정 언행을 중심으로 적용하는 미시적 개념으로 쓸 것을 제안했다.

이는 반지성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개인적으로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의 취지처럼 신중히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학생들의 게임 중독보다 어른들이 중독된 반지성주의일지도 모른다. 반지성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문가나 비판자는 일반 대중들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조력해왔고 대중들의 협력자로서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는 미국인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만연해 있지만 동시에 지식인들도 과거보다는 더 인정을 받아 어느 의미에서는 과거보다 만족스러운 지위를 누리고 있다. 과거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중의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적인 삶을 인정한 점이다. 그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회에서도 미덕은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명의 개화가 지성을 배제함으로써 비롯된다면 미래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특정 신조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역사의 저울을 좌우하는 한,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며 산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자발적인 욕구는 지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문명은 그것과 함께 꽃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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