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련 심리상담연구소 퍼블릭 대표
박경련 심리상담연구소 퍼블릭 대표

영국에 잠시 살 때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가정통신문의 전면에 “우리가 사랑하는 누구의 아빠 David(가명)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소중한 가족이었고 친구였습니다” 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실명과 자녀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분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David는 저희 아이의 반 친구 아빠로 당시, 자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통해 사망소식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는데 모든 학부모에게 공식적으로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저에게는 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만약 아이 친구의 아빠가 이렇게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안타까운 소식에 놀라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쉬쉬하거나 뒷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이런 식의 공식적인 애도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정통신문에 상실, 죽음, 애도에 대한 책이나 도움받을 기관을 하나하나 소개해 두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연령별로 함께 읽을 만한 그림책이나 책들을 소개하며 아이들과 상실이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돕고 있었고, 이 일로 어려움을 겪을 경우 도움받을 기관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저는 영국 사회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살은 더욱 그러합니다. 상담실에서 만난 자살유가족들은 ‘자살하면 좋은 곳에 못 간다’는 말에 아파 울고, ‘남은 사람이 울면 돌아가신 분이 좋은 데 못 간다’는 말에 나오던 울음을 삼키기도 합니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힘들면 실컷 울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거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상대가 편안할 정도로 곁에 있으면 어떨까요.

애도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써서 하는 노동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빵공장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10·29 참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고, 죽음을 이야기해서 결국 애도에 이르는 따뜻하고 성숙한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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