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사람 인(人)은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있는 형상이다. 즉,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 다른 사람과 멀어지면 고통을 느끼게 진화되어 왔다.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들은 사회가 거대해질수록 왜소해지는 개인의 역할과 존재가치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경쟁사회는 주변의 경쟁 상대들과 속마음을 나눌 수 없게 만들고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신념, 생활양식 등이 다양해지면서 공통분모가 감소하고 갈등도 증가한다. 갈수록 친밀한 교재와 애정을 나누는 일이 줄어들고 있고 SNS(social network service) 또한 접촉의 양은 증가하였지만, 질은 피상적으로 만들었다.

요즘 들어 ‘레트로’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레트로는 ‘추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Retrospect의 줄임말로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흐름 즉, 복고풍이나 복고주의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차가운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이 더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가끔은 옛일이 그립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오랜 시간 친구 없이 지내는 필자도 가끔 옛 친구가 생각날 때가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기능이 쇠퇴하고 감정이 메말랐어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해묵은 인맥이 있다. 십수 년 동안 아주 얇게 친분을 이어오면서 서먹하고 불편할 때가 더 많지만 가끔 얼굴을 맞대고 앉으면 사는 이야기보따리가 제법 두툼한 사이다.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고 말동무라고 하기엔 화법이 다르다. 학연도, 지연도, 직업도, 생활수준도 같지 않다. 한동네에 산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한 동네에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준 매개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구’이다. 그녀는 화구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화방을 운영하겠지만, 그림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미술도구나 재료를 더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딱 보면 안다. 나와 비슷하다. 그 점이 우리를 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좋아하는 물건들이 가득 찬 화방은 최상급 인테리어의 카페 못지않다. 일회용 컵에 믹스커피로 내온 커피 한 잔은 고급 카페의 원두커피보다 맛있다.

붓의 종류, 물감의 역사, 캔버스 사이즈 등 작가의 화력만큼이나 제작품의 재료는 중요하다. 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술계 동향으로 이어진다.

올해 들어선 새 정부는 미술과 연관이 깊다. 일밖에 모르던 검찰총장과 사업가를 결혼에까지 이르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미술이었다. 상당한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대통령과 미술을 전공한 전시기획자 출신인 부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싼 화구들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BGM(background music)처럼 잔잔한 배경이 되어 준다.

그런데 사실 필자는 화구 못지않게 작품을 더 좋아해야 하는 처지이다. 30년 전부터 친정에서는 화랑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믹스커피보다는 원두 드립커피를 더 좋아해야 어울린다고 할까.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봉지 커피나 스페셜 커피나 다 잘 마시는 것처럼 나야 화구도 좋아하고 작품도 좋아한다. 

한 번은 먹이 없어 갈아놓은 먹물을 사러 화방에 간 적이 있다. 필방도 아니데 먹물을 팔 리가 없다. 아, 그런데 내가 찾는 먹물이 있는 게 아닌가! 화가들도 가끔 먹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구색으로 갖추어 놓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붓과 한지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필방만큼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벼루만 없었지, 요즘 식으로 문방삼우(만년필, 잉크, 종이) 정도는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를 배려해 준비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고마웠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바쁜 실정이라 화방을 자주 찾지는 않는다. 가끔 실생활에서 전문가용 물감이 쓰일 때, 이를테면 실크 벽지에 때가 탔다든지, 구두코가 까졌다든지, 테이블이 낡아서 보기 싫어졌을 때 아크릴 물감 등이 요긴하게 쓰인다.

그럴 때에는 화방을 방문해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오랜만에 수다도 떨곤 한다. 그런 물감은 싼 것 한두 개면 충분하니 주인장은 그냥 공짜로 쥐어준다.

얼굴 보고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됐다며 또 오라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기분 좋게 헤어진다. 답례로 작품을 손에 쥐어 줄 수는 없지만, 필자도 언젠가는 얻어 쓴 물감들 값을 갚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웃에 인심이 좋은 사촌이 있다는 것은 가끔은 팍팍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부드러운 윤활유가 되어 준다.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가까이 살면서 생활권으로 파고든다.

그들과 함께 현재에 녹아 있는 과거의 느낌들을 공유하면서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도 온정을 나누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가끔은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믹스 라떼도 마시면서 지구촌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이웃과 사촌의 우애를 쌓아갈 것이다.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기쁨으로 따뜻한 미래를 만들며 더 나은 인간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저작권자 © 공생공사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