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김가령 수필가(대한민국아카데미미술협회 초대작가)

“제발 좀 빨리해요. 어이구, 속 터져.”

무엇을 해도 느릿느릿한 나를 보고 남편은 불평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도 좀 빠릿빠릿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단지 속도가 느릴 뿐 무엇인가 하고는 있으니 남편은 못마땅해도 기다려 주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느린 것도 많이 빨라졌다. 반복으로 숙련이 되어 그런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도 느린 편이다.

느린 사람을 보고 ‘황소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황소가 논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서 농토를 일구는 것을 보면, 많은 동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보는 오로지 한 눈 팔지 않는 우직함으로 일관(一貫)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걸음걸이는 일을 이루기 위해 결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황소의 걸음이 느려도 최고라고 하는 것은 그 방향 하는 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듯 인생에도 일정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활을 쏘는 자는 물론 과녁을 맞히고자 하겠지만, 먼저 과녁의 소재를 알아두지 않으면 맞힐 수 없다.

지선(至善)의 소재를 알면 곧 마음에 정향(定向)이 생기고 그 방향으로 길이 잡히는 것과 같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고 가야 할 바른길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바쁘더라도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한편으로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미덕이 아닐 수도 있다. 화장실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좀 여유 있게 살고 싶어도 쉽게 바꿔지지 않는 일상은 매일 되풀이되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금은 느긋하게 한 가지 일이라도 제대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바쁘게 움직이더라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결국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금방 달아오르는 양은 냄비는 라면은 끓일지언정 깊은맛을 우려내는 요리를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라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라면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몸도 시간이 걸려도 정성을 들여 제대로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한다. 패스트푸드 대신 밥을, 자동차 대신 두 다리로, 휴대전화 대신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보자.

하루하루 속도와의 전쟁 속에서 생활하지만, 전쟁에서 승리의 요체(要諦)는 속전속결(速戰速決)이라지만 엄밀히 말해 생활이 전쟁은 아니니 무슨 일이든지 급하게 서두르기보다 찬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빨리 진행하여 빨리 끝내버린다면 결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의외로 일이 잘 처리될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을 듯하다. 달리는 말 위에서는 사물을 아무리 잘 살펴보려고 해도 말이 달리는 속도가 빨라 순간순간 스치는 모습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은 방향이 먼저임을 상기(想起)하고, 이제라도 나에게 맞는 속도로 사는 법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Poerre Sansot, 1928~2005년)는 ‘느림’이란 삶의 매 순간을 느끼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적극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느림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계획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명예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법 없이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대화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별생각 없이 내뱉은 조급한 말들로 결정된 일상들이 모여 나의 삶이 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으냐고.

황소의 경우 그러할 일은 1도 없을 듯하다. 농부가 결정한 방향으로 묵묵히 농사일을 끝낸 황소는 해질 무렵 달구지 하나를 메고 예의 걸음걸이로 돌아와 외양간으로 향한다. 천천히 하는 것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한 것임을 한결같은 속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마냥 느리기만 한 거북이걸음이나 달팽이 걸음과는 다르다. 생산적이고 능률적이다. 그래서 호의적으로 보아왔다. 요즘은 트랙터와 경운기가 황소의 일을 훨씬 더 빠르고 수월하게 해내지만,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재산을 늘리고 믿음을 주었으니 어찌 그 걸음을 재촉하였겠는가. 그저 보조(步調)에 맞춰 따라갈 수밖에.

마음속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중요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황소걸음을 기억해두자. 느려도 힘 있게 뚜벅뚜벅 걸어서 일을 이루는 황소의 삶에서 또 한 가지를 배운다. 인생은 방향이 정해지면 속도는 ‘슬로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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