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편 뒤 10년…무작정 떠난 안정훈의 세계일주 이야기
“한 번쯤 나만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면 지금 떠나세요”

안정훈 전 공군 준장이 지난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예편 10년 만에 700일간 세계 49개국을 떠돈 얘기를 풀어놓고 있다. 김성곤 선임기자 public25.com
안정훈 전 공군 준장이 지난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예편 10년 만에 700일간 세계 49개국을 떠돈 얘기를 풀어놓고 있다. 김성곤 선임기자 gsgs@public25.com

선배로부터 그를 소개받았다. 여행을 좋아하고, 소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며 칼럼니스트로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안정훈(67) 전 공군 정훈감(준장)이다. 직접 만나보니 군 출신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온화하다. 정훈장교 이력이 많아서 그런가.

평소 꿈을 실현하고자 떠난 러시아 여행이 기폭제였다. 20여 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반퇴인생’을 접었다. 그렇게 이어진 것이 700여 일 49개국 여행길이다. 그는 이 경험과 추억을 책으로 엮어 내년 초 출판한다.

기자도 세계일주까진 아니지만,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에 빠진 두 사람이 만나니 얘기가 끝이 없다. 700일간의 여행담을 풀어놓을 땐 어린아이처럼 신이난다. 안나푸르나 ‘메르디 히말’ 트레킹 대목에선 자부심이 한껏 묻어났다.

칼럼을 쓰기 전에 먼저 그의 얘기를 소개하자는 욕심이 났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셨나 봐요” 가장 흔한 질문이다.

‘집시’ 본능 일깨운 러시아 일주여행
 
“젊었을 때의 꿈이 죽기 전에 ‘세계일주여행을 해보자’였습니다. 그런데 일에 쫓겨 가지 못했습니다. 퇴직 후에야 아내와 패키지로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안 선생에게 패키지여행은 항상 아쉬움을 남겼다. 그가 갈망했던 것은 자유였다.

무작정 출발했다. 그게 2017년 4월 26일. 처음엔 20여 일로 시작했는데 그 이후 700일간 세계를 떠돌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49개국을 돌았다.

여행이란 게 매사 정해진대로 이뤄지면 무슨 재미인가. 사건과 마주하고, 후회하고, 사람이 무서워지고, 그러다가 도움과 만나고…. 정해지지 않아서 여행이라고 했던가.

“러시아 여행을 마치니 핀란드 등 북유럽 4개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빌트 3국, 동유럽 발칸 13개국까지….”

안정훈 선생이 쿠바에서 트럭을 개조한 버스인 트럭버스 카미용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안정훈 선생 제공
안정훈 선생이 쿠바에서 트럭을 개조한 버스인 트럭버스 카미용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안정훈 선생 제공

그렇게 5개월여 동안 떠돈 나라가 25개국이다. 하지만, 이미 방랑에 친숙해진 그다. 남유럽을 거쳐 모로코에서 끝날 것 같던 그의 시선은 중남미로 향한다.

“멕시코와 쿠바에서 5개월 이상 있었던데 거기선 왜 그리 오래 계셨나요.”

“쿠바에서는 여권을 잃어버려서 다시 만들고 하느라고 1개월 가까이 있었고요. 멕시코에서는 스페인어 공부한다고 5개월쯤 있었지요. 그 후에 5개월간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 남미 9개국을 돌았어요.”
 
쿠바와 멕시코에서 보낸 6개월
 
좋은 일도 있지만, 여행자가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게 사건사고다.

러시아 도착 첫날 숙소를 못 찾아서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반나절을 걸어서 헤맸고, 쿠바와 인도에서는 여권을 잃어버려 막막했던 적도 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노트북을 버스에 놓고 내렸다. 노트북보다 아까운 게 그때 잃어버린 사진들이다.

“멕시코에선 슬럼가에 잘못 들어섰다가 휴대전화기를 뺏겼어요. 멕시코에 사는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현지인도 잘 안 오는 이런 곳에 왜 왔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휴대전화기는 찾았지만, 아찔한 기억입니다.”

차나 비행기를 놓치고, 길 잃고, 가진 돈과 물건을 잃는 것은 다반사다. 모로코에서는 마리화나 강요하는 숙소에서 새벽에 도망쳐 나오기도 했고, 피지에서는 핸드폰을 퍽치기당했다.
 
뺏기고 잃어 버리고, 놓치고 그게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의 고단함은 여행으로 풀었고, 시간은 그 외로움과 두려움들을 추억으로 만들었다.

“네팔에 가서 해발 4500m의 ‘메르디 히말라야 베이스캠프’(MBC)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35일 동안 포카라 등 네팔에 머물면서도 체력에 자신이 없고 고산증이 무서워서 못 올랐는데 현지인들이 ‘그 정도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올랐는데 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지요.“

2018년 안타푸르나 메르디히말 베이스캠프(4500m)에 오른 안정훈 선생이 설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정훈 선생 제공
2018년 안정훈 선생이 고산증을 겪으며 안타푸르나 메르디히말 베이스캠프(4500m)에 오른 뒤 설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정훈 선생 제공

숨이 턱턱 막히고, 고산증이 왔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오른 게 그에게는 아직도 뿌듯하기만 하단다.

“부인께선 반대하지 않았나요.” 떠도는 그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을 물었다.

“아내와 딸 둘은 모두가 열렬한 써포터즈였습니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 살았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오히려 격려해 주었습니다. 여행 시작한 지 15개월이 지났을 때 아내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나 2주 동안 ‘리허니문’(re honeymoon)을 즐긴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지요.”

여행의 고달픔은 여행으로 풀고, 고난은 추억이 되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건강검진을 하니 혈당치가 높게 나왔다. 영혼은 자유로웠지만, 규칙적이지 못한 삶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리핀에 가서 3~4개월 살았다. 혈당 수치도 제대로 돌아왔다.

악마의 목구멍으로 불리는 남미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정훈 선생 제공
악마의 목구멍으로 불리는 남미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정훈 선생 제공

비용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연금 생활자의 최대 장점은 몸만 성하면 생활이든 여행이든 어려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아껴서 하는 자유 배낭여행은 일반 패키지여행보다 경비가 훨씬 덜 듭니다. 매달 용돈 받듯이 아내에게 100만원 정도를 송금받았습니다. 물론 평소 만들어 놓은 약간의 비자금도 유용하긴 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60대 중반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지요. 특히 치열하게 살았던 퇴직자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주역들입니다. ‘금수저로 태어나 꽃길만 걸어왔나요’라고 묻고 싶어요. 여행이 편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만 갖는다면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저질러 보세요. 다만,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건 말리고 싶습니다. 정말 진짜 한 번쯤은 나만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 넓은 세상을 보고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싶다, 그리고 역마살이 있거나 자유로운 영혼을 원하시는 분은 떠나세요. 지금은 경험자도 많고 정보도 많습니다. 조금만 노력하고 검색하면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김성곤 선임기자 gsgs@public25.com

〈안정훈은〉

이젠 자동차로 세계 일주를 꿈꾸는 자유영혼
 
1952년생이다. 학사 장교 소위로 임관해 공군 정훈감을 거쳐 30년만에 예편했다. 사회에 나와 10여 년 동안 사업도 하고, 해외 봉사도 하며 ‘반퇴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 경로석에 앉는 나이가 됐다. 우스갯소리로 ‘지공’(지하철 공짜) 반열에 오르는 65세가 돼버린 것이다.

절박했다. 이러다가 진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창 시절 대학 학보사에서 여름 방학 엠티(MT) 때 동해를 따라 부산까지 ‘배가본드’(Vagabond) 여행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목적지도 계획도 없는 그 여행이 최고의 감동을 주었다. 언젠가는 혼자서 배가본드 여행을 해보겠다고 생각했었다. 한동안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40년 전의 꿈을 소환했다.

20일 정도 러시아 횡단을 목표로 하고 떠났다. 갑작스런 결정이라 계획도 준비도 엉성했다. 러시아에서 핀란드로 넘어갈 때 ‘쿠오바디스’(Quo Vadis)를 외치며 고민했다. ‘귀국할 것이냐 여행을 계속 할 것이냐. 지금이 아니면 못 간다. 힘차게 “고”를 외쳤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렇게 해서 700일간 49개 나라를 여행했다.

그의 로망은 죽기 전에 세계 일주하기였다. 힘들었지만 2년여 동안 ‘5대양6대주’를 밟아 보았으니 꿈을 이루었다. 인생 2막은 도전하고 모험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날 나 자신과의 약속도 지켰다.

지금은 설레면서도 두려웠고, 고생스러우면서도 행복했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매일 매일 들뜬 기분으로 유쾌하게 살고 있다. 여행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일을 끝내고 나면 유라시아 횡단 자동차 여행을 할 계획이다.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여행 콘서트도 할 생각이다. 그리고 또 여행을 떠날 것이다. 여행하다가 길에서 죽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믿고 산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안정훈(67)이 털어놓은 자신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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