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19)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첫 출근 때 만났던 상사는 이제 생각해 보니 전형적인 ‘똑부’(똑똑+부지런함)였다.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쉼 없이 일하였다. 지시가 떨어진 일은 물론이고 그 외의 일도 앞질러서 찾아 했다. 목표치도 높아 거기까지 도달하면 즉시 한 단계 높였다.

물론 나는 많이 배웠고 이후의 직장생활은 단단해졌다.

이후 수십 년이 흘러 더 센 똑부를 만났다. 그는 작은 일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전체를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도 지녔다. 그의 책상에는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주말에 퇴근할 때는 가방이 터지도록 자료를 한가득 싸 들고 갔다.

물론 나도 많이 배웠다. 쫓아가느라 실력도 늘었다. 그러나 가진 능력이 평범한지라 허덕이다 도중에 탈락했다.

죽자고 따라간 몇몇은 그를 닮아 갔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원조 똑부를 뛰어넘지는 못했고 최고의 자리에서도 그의 영향권 안에서 움직였다.

드물지만 ‘똑게’(똑똑+게으름)도 만났다. 그는 명석하고 핵심을 잘 잡았다. 직관력도 뛰어났다.

근데 이분 스타일은 좀 달랐다. 사무실에서 빈둥거릴 때가 잦았고 직원들을 불러 이것저것 사사로운 대화를 하기도 했다. 퇴근도 웬만하면 정시에 했고, 집에 갔겠지 하면 맥줏집이라며 일하는 팀원들을 불러냈다. 도대체 이분은 언제 공부하고 고민하나?

그는 일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서 우리는 핵심적인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서툰 나를 믿어 주었고 자율성을 주었다. 방향이 어긋나면 중간에 핵심을 잡아 주었다.

나는 그와 일하며 스스로 일과 씨름했었다. 제일 좋았던 것은 이분이 윗선과의 회의에서 불필요한 일은 커트한다는 점이었다. 제일 존경했던 리더였다.

그러나 희귀종인 이분은 어느 인사철에 쓸쓸히 짐을 쌌다. 더 이상의 배움의 기회가 없어진 나는 무척 아쉬웠다. 어떤 조직이건 말로는 리더의 역량과 임파워먼트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그의 스마트한 여유가 거슬렀나 보다. 한국적 상황에서 농업적 근면성은 무시 못한다.

직장생활 통틀어 제일 많이 만났던 리더는 ‘멍부’(멍청+부지런함)였다. 그는 성실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일은 핵심과 우선순위에 관계없이 다 끌어안았다.

방향을 못 맞추니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전부 커버하려 했다. 누가 보면 혼자 일을 다했다. 온종일 일에 매달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자칫 능력자로 오인 받았다.

운 좋게 그의 옆에 헌신적이고 뛰어난 참모가 있다면 어느새 능력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과 없이 내려오는 일 폭탄에 팀원들은 지쳐갔다. 이걸 꼭 해야 하나? 저 사람은 자기 생각은 없나? 어쨌든 현실엔 멍부리더가 제일 많았다. 제일 짜증 났던 리더였다.

제일 편했던 리더는 ‘멍게’(멍청+게으름)리더였다. 정확히 말하면 게으르기보다는 일의 핵심을 모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몰랐다. 윗선의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엉뚱한 지시를 내린다. 이러다 보니 밑에서는 회의에서 거론된 핵심을 파악하느라 타부서를 뛰어다녀야 했다.

어쩌다 자신에게는 턱없이 큰 의자에 앉게 된 이분. 이건 조직의 실수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의 비리(?)다. 그의 승진 뒤에는 각종 소문이 따라붙었다. 이런 인사 또한 적지 않았다. 그와 일하면서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편했다. 오랜만에 쉬어 가는 기분 이였다. 그러면서 뒤가 개운치 않았다.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어떤 리더에게서 가장 많이 배웠는가?

똑부와 일하면서 많이 배웠지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고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이분의 특징 중 하나가 본인과의 케미이다. 많은 일을 소화하다 보니 속도와 방향이 중요했고 따라오지 못할 경우 아웃이었다. 속도는 그나마 따라갔으나 종종 다른 의견을 내곤 했던 나는 어느새 그의 군단에서 밀려났다. 소수의 군단만이 최종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계속되는 잔발질과 숨막힘을 생각하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똑게와 일하면서는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컸다. 웬만한 일에서는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었다. 지켜보는 눈을 느낄 수 있었으나 사사건건 관여는 없었다. 실수하면 방향을 다시 잡아 주었고 결과에 대해서는 같이 책임을 져주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워낙 드물고 끝까지 가지 못했기에 배울 기회가 많지 못했다.

멍부와 일 할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우선순위 없이 쏟아지는 일이었다. 일의 양보다 의미부여가 안 되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사소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들,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일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니 정리도 되었고 새롭게 알게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분에게는 변치 않은 성실성을 배웠다. 그리고 그 성실이 뭉쳐 실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제일 많이 성장했던 것은 의외로 멍게와의 경험이었다. 물론 이분에게 직접적으로 배운 것은 없다. 허나 이 양반을 기댈 수 없으니 내가 나섰다. 촉각을 세우고 스스로 뛸 수밖에 없었다.

안테나를 높이 세워 회사 돌아가는 것을 감지해야 했고, 사업핵심에 맞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고민하며 팀원들을 독려하고 머리를 맞댔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면서 제일 크게 성장했다.

지나간 상사들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리더였을까? 스스로는 똑부라고 착각했지만, 타인의 눈에는 멍부였지 않았을까? 그저 농업적인 근면성만 가지고 괜한 일에 아등바등하느라 직원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닐까?

여러분은 현재 어떤 리더와 함께 하고 있는가? 혹시 지금의 리더에 불만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여러분 자신은 어떤 리더인가?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가?

돌아보니 어떤 리더에게도 배울 것은 있었다. 역설적으로 제일 부족한 리더에게 제일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는 리더를 선택할 수 없다. 그를 바꿀 수도 없다.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행동과 태도이다. 주인공은 리더가 아니라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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