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13)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부사장님. 지난번 칼럼에서 걸려 넘어진 곳에서 순금을 발견했다는 문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아직 인생의 오전 시간을 다 보낸 것은 아니지만, 오후, 후반부 인생을 위해 잠시 쉬어 가려 좀 긴 휴가를 떠납니다.”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의 바로 이전 칼럼을 읽고 보낸 것이다. 순간 마음이 쿵했다. 뭔 일이 있구나 싶었다. 즉시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되었다. 역시 병원이었다. 아직은 정밀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지만 몹쓸 병을 발견했다 한다. 불쑥 나오려는 한마디를 겨우 삼켰다. ‘내 그럴 줄 알았어!’

40대 중반인 그녀는 치열하게 일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동료는 이런 그녀를 꼭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긴 하나 한편으론 부담스러워 한다.

“김 차장. 일은 최고지. 근데 너무 완벽하게 일을 하니 좀 피곤해. 대충 넘어가는 게 없어.”

사무실에서 제일 일찍 출근하던 나는 어느 날 아침 그녀와 딱 마주쳤다. 아니 벌써 출근? 그러나 알고 보니 전날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 근처 모텔에서 자고 나온 것이었다.

혼자 모텔에서 자는 것이 뭐해서 남편까지 불러 눈 붙이고 아침 일찍 나온 것이다. 그 남편은 무슨 죄? 그렇게 몇 달을 고생한 끝에 그해 사업계획 프로젝트를 끝냈다.

그녀는 아이가 셋이다. 회사에서 빡세게 일하고, 평일 밤과 주말이면 함께 사는 시어른들을 포함한 대식구의 먹거리를 도맡아 하느라 늦은 밤까지 국 끓이고 반찬 만든다.

최근에는 크게 방황하는 큰아이 문제로 회사 탕비실과 화장실에서 눈이 빨개진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옆에서 지켜본 내가 다 숨이 찼다. 그녀에게 잠시라도 숨을 공간이, 자기만의 공간이 있을까?

지금 이렇게 뻑이 난 그녀 앞에 나는 막냇동생 보듯 부아가 치민다. ‘이 친구야! 자기 몸도, 마음도 좀 살펴야지. 자신이 제일 소중하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불자인 친구가 있다. 경청과 맞장구의 대가이며 성품도 온화하여 친구들이 참 좋아한다. ‘저런 사람과 살면 어떨까’라는 남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친구에게는 지방에 혼자 지내시는 90대 중반의 시어머니가 있다. 그래서 수시로 지방을 가고 모든 생필품을 인터넷으로 시켜 드린다. 그간 내 친구의 헌신으로 고부간의 관계가 무척 좋았다.

근데 작년 말부터 시어머니의 치매가 시작되었다. 다른 것은 말짱하신데 며느리에게만 되지도 않는 타박이 시작되었다. 방에서 몰래 돈을 가져갔네. 물건을 훔쳐 갔네. 나를 넘어뜨렸네 등등.

당혹감과 배반감으로 친구는 한참을 속앓이를 하였고 흰머리도 부쩍 늘었다. 시어머니의 뒤집어씌우기가 계속되자 그녀의 남편은 자신이 부인의 역할을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그간 집안 대소사를 부인에게 맡기고 늘 한발 물러나 있던 남편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친구는 이제 씩씩하게 털고 일어났다. 미뤄왔던 불교대학을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고 명상을 시작했다. 요가도 배우고 얼마 전부터는 스윙댄스를 배우며 즐거워한다.

항상 가족과 주변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그들을 살피던 그녀가 환갑을 코앞에 두고 이제 스스로를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우린 입을 모아 말한다. “친구야. 시어머니가 가시기 전에 너에게 큰 선물을 주시는구나.”

상황이 그리되었지만 어쨌든 내 친구는 이제야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했다. 다행이다.

나 또한 앞의 후배처럼 직장과 가정이라는 두 영역을 분주히 오가며 20여 년을 보냈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아니 나만의 공간을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다 오십을 앞두고 달리던 길에서 잠시 멈추었다.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솟아올랐다.

주말마다 땅을 보러 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주변에서 백이면 백 사람 다 말렸다.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부동산전문가인 지인도 대놓고 말렸다. 자고로 물소리 새소리 나는 곳에 돈 들이면 망한다고 했다. 사람은 차 소리, 사람소리 나는데 살아야 한단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한동안 전국을 쏘다녔고 제법 진지하게 계산기를 두드린 적도 많았다.

그러다 체념하고 몇 년 전에 불현듯 아파트 생활을 청산했다. 출퇴근이 가능한 서울 외곽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지었다. 이사한 후에 주말마다 정원에 나가 손바닥 만한 땅을 헤집고 뒤집고 잡초, 벌레와 씨름을 벌인다.

겨울에 죽은 듯이 얼어 있던 꽃과 나무들이 이른 봄, 앙증맞은 촉을 슬며시 내밀며 쑥쑥 올라온다. 들여다볼수록 기특하고 신기하다.

한쪽 구석에 심었던 일년초가 다음해 마당을 온통 점령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작은 마당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지켜보는 시간들은 내게 큰 평화와 행복감을 준다.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며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시간들. 실수도 많이 하고 넘어지기도 했던 그 기간 나의 작은 정원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하루의 고단함과 끙끙거림 속에서도 나는 퇴근하면 마당으로 향한 거실문을 쓱 한번 연다. 흙과 생명체들의 냄새들. 붕 뜨고 번잡한 마음이 슬쩍 가라앉는다. 그래. 내가 목말랐던 것은 농사보단 이렇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던 거다.

밖에서 딴딴해진 감정의 압력을 슬쩍슬쩍 빼는 나만의 공간. 우리 동네에는 정원모임이 있다. 정원이 하도 작아 모임 이름도 ‘손바닥 정원’이다.

이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은 엄청 바쁜 글로벌회사 임원이다. 그녀는 우리 중에 단연 식물 전문가이다. 특히 씨를 싹 틔워 꽃을 피우는데 전문가라 ‘발아의 여왕’이라 불린다.

그런 그녀가 몇 년 전부터 발효에 꽂혔다. 직접 담근 막걸리 파티에 초대하기도 하고, 그 바쁜 와중에 된장, 고추장도 담근다. 잠은 언제 자는지 모르겠다.

숨 막히는 글로벌 회사에서 헉헉거리다가 주말에는 온종일 정원을 돌보고 막걸리를 빚는다. 그녀의 마르지 않는 활력은 이 공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퇴직 후 식물 발아와 발효를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하며 넌지시 나에게도 합류를 권한다.

후배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공간을 가졌는가? 힘들고 지칠 때 찾아갈 나만의 공간을 가졌는가? 일상에서 수시로 드나들며 맘과 몸을 돌보며 이완할 그 무엇을 가졌는가?

병상에 누워 결과를 기다리는 나의 안타까운 후배. 힘내시라. 어서 회복하시고 이제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자. 회사의 공간, 가족의 공간, 그리고 또 하나, 나만의 공간을 말이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얼까? 결혼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취미가 뭐였던가? 지치고 짜증날 때 나는 무엇으로 위로 받았던가? 그것이 나에게는 손바닥 만한 정원이고, 내 친구는 시어머니의 선물로 주어진 명상과 요가의 세계이고, 또 어떤 이는 발아와 발효의 공간이다. 후배여, 당신도 한때는 문학을, 글쓰기를 꿈꾸었다 말하지 않았나?

직장에서 치받히고 집에서도 온전히 쉬지 못하는 여성 후배들이여. 우리만의 공간을 확보하자. 밀레니얼 친구들은 회사문을 나서는 순간 전혀 다른 공간으로 향한다. 그들은 퇴근 후 요가와 격한 스포츠를 즐기고, 유튜버로도 활동하며 사무실과는 딴 사람이 된다.

김난도 교수가 말하는 ‘멀티 페르소나’이다. 이미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영특한 친구들. 이제 그들에게 배우자. 우리도 하나쯤은 우리만의 공간을 가져보자. 누가 알겠는가?

‘발아의 여왕’처럼 나만의 공간이 제2의 직업으로 이어질지를. 체념했던 나의 농사짓기 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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