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9) 북유럽과 발트, 발칸 반도 여행(상)

발칸반도의 안정훈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길거리의 동상하고도 농담 따먹기하며 놀았다

멍청한 여행, 후회되는 여행 

러시아에서 핀란드의 헬싱키로 넘어가기 전 물가가 비싼 북유럽 4개 국가를 어떻게 여행할 것인지 고민을 했다.

러시아 여행만 계획하고 떠났다가 즉흥적으로 북유럽까지 가기로 했기에 예산 부족이 제일 큰 문제였다. 일단 최대한 아끼고 줄여서 생활하기로 했다. 체면 따위는 접어두고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변신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나는 소심해졌다. 쫄보가 되어 싼 것만 찾아다녔다.

북유럽을 가면 피오르(fiord·옛날 빙하로 생긴 깊은 협만. 한국같이 빙하가 없었던 곳에서는 볼 수 없고 빙하가 두껍게 발달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유럽의 노르웨이, 남미 칠레의 남부, 그린란드 해안 등이 유명하다) 관광이 기본이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에 모두 생략하기로 했다.

박물관, 맛집, 카페, 비싼 숙소 등은 쳐다보지도 말자고 다짐했다. 어지간한 거리는 무조건 걷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 그런 식으로 북유럽 4개국의 수도만 돌아보고 최대한 빨리 물가가 싼 발트국가로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도 가장 후회되는 건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Edvard Munch) 박물관에 갔다가 입장료 100노르웨이 크로네(NOK·약 1만 3000원)가 아까워서 망설이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보고 온 것이다.

소심하게 로비에 비치된 도록으로 ‘절규’ ‘마돈나’ ‘사춘기’ 등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순간의 판단 미스가 평생의 후회를 낳는다는 말이 딱 맞다.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멍청이 짓을 했다.

다시 여행 스타일을 바꾸다. 마음 부자로 살기로 했다

평생 후회되는 일은 돈, 시간 절약한다고 뭉크박물관을 패스한 것이다
평생 후회되는 일은 돈, 시간 절약한다고 뭉크박물관을 패스한 것이다

비슷한 엉터리 짓을 계속하며 2017년 5월에 북유럽 4개국을 14일 동안 여행했다. 그리고 나서 6월 1일부터 34일간 발트와 발칸 국가들을 다녔다. 북유럽보다 물가가 많이 쌌지만, 여전히 구두쇠 짓을 하고 다녔다.

가봤다는 걸로 만족하는 여행이라 힘만 들었지 의미도 없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회의감이 들어서 나의 여행을 정리하고 반성했다. 그리고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만약 내가 젊은 나이라면 경비를 최대한 아끼고 줄여서 되도록 많은 나라를 여행하는 게 당연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젊은 배낭족들을 따라하는 건 어리석다”고 결론을 내렸다. 불필요한 지출은 최대한 줄이되 꼭 필요한 건 절대 아끼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여행지인 스페인과 모로코 여행(2017년 7월 15일부터 8월 7일)은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었다. 일정도 넉넉하게 잡았다. 가보고 싶은 곳은 모두 가보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해보는 여행을 했다. 박물관, 미술관도 보고 택시나 투어 버스도 타고 한국 식당과 맛집에도 가고 숙소도 업그레이드해서 즐겼다.

지난 연말에 가족들과 함께 뮤지컬 레베카를 보았다. VIP석 3명의 입장료가 75만원이었다. 비싸거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북유럽과 발트 발칸 여행 중에는 겨우 돈 1만원이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 그건 내가 과도하게 긴장했고 마음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긴 헛발질 끝에 앞으로는 마음 부자로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비하다

다행히 2020년 4월, 유라시아 자동차 횡단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내년으로 잠정 연기한 상태다.

팀원 4명이 한국 동해항에서 SUV 차량을 가지고 출발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을 모두 돌아보고 발트 발칸을 돌아 터키와 코카서스 3국으로 해서 귀국하는 7개월 여정이다. 코로나19만 풀리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계속하며 틈틈이 국내 로드워크로 팀워크를 다지고 있다.

자동차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일부러 북유럽과 발트 발칸을 코스에 넣고 충분한 시간을 잡았다. 나의 지난번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서다. 나에게는 패자부활전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이번 연재에서는 북유럽과 발트 발칸 여행기를 대폭 줄이거나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유라시아 자동차 횡단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음번 기회에 제대로 써 보기로 했다.

발칸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며 힘들어하다

북유럽과 발트를 여행하고 나서 발칸 여행을 시작하니 또다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발트국가들은 유럽 분위기가 많았지만, 발칸 국가들은 구소련의 연방이었거나 위성국이었던 탓에 슬라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더구나 이슬람교도가 많았다. 매 시간 스피커에서 묵직하고 공격적인 음색으로 코란을 읽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는 게 왠지 으스스했다. 대부분 무섭게 생긴 표정에다 무뚝뚝한 태도도 못마땅했다. 그리고 얼굴 전체가 검은 수염으로 덮인 사내들의 거칠고 투박한 어투는 나를 겁 먹게 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는 바다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바닷가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부부를 보면서 몹시 부러웠다. 다음 번에는 나도 아내와 같이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는 바다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바닷가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부부를 보면서 몹시 부러웠다. 다음 번에는 나도 아내와 같이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칸 반도를 여행하면서 왠지 불안하고 적응이 잘 안 됐다. 한적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잔뜩 긴장해서 두리번거리곤 했다. 한국 식당은 물론 중국 마트도 없어서 음식 고생도 많았다.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몸이 힘들어서인지 외로움이 밀려왔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움의 쓰나미가 몰려와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발칸반도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객창감’에 깊이 빠졌다. 여행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이었다.

‘객창감’이란 ‘나그네가 느끼는 쓸쓸한 정서 혹은 여행하면서 느끼는 낯선 감정이나 집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러다가 우울증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심했다.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 대부분의 나라가 땅덩어리가 작아서 여행에 속도를 내자면 얼마든지 빠르게 돌아볼 수 있었지만, 객창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힘도 들고 재미도 없었다. 패잔병처럼 느리게 느리게 전진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방법은 실컷 슬퍼하고 우는 것이었다

다행히 크로아티아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정말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국립공원과 로마시대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고대 도시들에서 나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만약 발트와 발칸에서 가볼 만 한 곳을 딱 한 군데만 추천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크로아티아라고 말하겠다.

발트와 발칸을 여행하면서 동양인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크로아티아에서 처음으로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모두가 패키지 관광객들이었는데 대부분 나이가 많은 중장년이었다. 한국말 대화를 가까이 가서 듣거나 가끔 짧은 대화를 나누며 모국어의 향수를 달랬다.

발칸을 여행할 때 하루 종일 비가 내린 날이 있었다. 호스텔 방에 홀로 누워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최백호의 ‘애비’와 양희은의 ‘한계령’ 같은 노래를 골라서 들으며 실컷 울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남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컷 슬퍼하고 우는 것이었다. 어렵고 힘이 들긴 했지만 마음의 심한 감기를 잘 이겨냈다.

혼자서 오랫동안 여행하다 보면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진짜로 여행을 사랑하게 되면 지독한 외로움도 즐길 수 있게 된다.

여행과 사랑에 빠지면 제대로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오감이 깨어난다. 영감과 상상력이 살아난다. 통찰력과 직관이 생긴다.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릴 수 있다.
진짜 여행은 객창감을 친구 삼아 다닐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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