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11)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장면 1
사무실의 한 직원이 한참 동안 안 보였다. 내가 그 직원의 부재를 알아차린 시점도 안 보인지 한 일주일 후였던 것 같다. 까닭을 묻는 나에게 담당 부장이 대답했다. “어? 모르셨어요? 일주일 전부터 휴가였는데. 2주 휴가로 해외여행 갔어요. 부사장님께 인사를 안 하고 갔나 보네요.”
뭐지? 긴 휴가에 말 한마디 없이? 이 친구 지난 추석에도 연휴 끼고 장기 휴가 갔었는데. 부럽다. 난 이제껏 일주일 휴가도 못 써봤는데.

장면2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직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배워 해결하고 싶었다. 하나 겨우 컴맹 수준을 면할 정도인데다 새로운 걸 이해하는 지력도 현저히 떨어졌는지라 PC를 이리저리 만지다 끝내는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여기서 도움을 주러 내 방에 들어오는 차·과장급 X세대와 대리사원급 밀레니얼 세대의 차이는 확실하다.  X세대는 PC 옆에 엉거주춤 서서 내 PC를 만진다. 거듭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선뜻 내 의자에 앉질 못한다.

반면 밀레니얼은 자연스럽다. 권하기도 전에 당연히 내 의자에 털썩 앉아 PC를 만진다. 그들의 작업에 걸리적거릴까 봐 나는 슬며시 자리를 비켜준다.

장면3
회사 내 핵심부서에 일 잘하는 20대 후반 여자사원이 있었다. 여성 리더로서 책임감도 있고 해서 나는 그녀를 항시 격려해 주었고 종종 겁나게 비싼 점심도 사주었다. 잘 성장하여 회사의 좋은 여성 자원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동안 그 여직원이 보이질 않아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이미 경쟁사로 퇴사한 후였다. 한 직급 높여서, 급여도 꽤 올려서 이직했다고 한다. 괜히 멍했다. 월급 차이도 크질 않던데 굳이 이직해야 했나? 이제껏 회사에서 키워 주었는데. 더군다나 내게 인사 한마디 없이. 쩝!

장면4
좀 번거롭지만 나는 본부의 모든 직원들과 함께 회의하기를 좋아했다. 자연스레 회사의 사안이 모두에게 공유된다. 소통 기회가 많은 부장, 팀장들뿐 아니라 대화 기회가 적은 젊은 사원들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러 저러한 반짝이는 의견들을 제시했다. 하나 그러한 추진을 위해 현실적인 어려움을 제시하는 고참들의 의견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허! 이건 아닌데. 그들의 무표정 아래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장면5
정기 인사이동으로 뜻하지 않던 한 직원이 우리 본부로 전입했다. 본인도 예상 못 한 발령이었다. 입사 5년차에 한 해에 한 번씩 부서를 이동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후 그는 인사부에 면담신청을 했고 부당한 이동에 대한 정확한 사유를 요구했다.

인사부는 정확한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인사부와 전 부서를 왔다 갔다 하느라 새로운 업무를 하지 못하는 눈치여서 나는 직접 인사부장을 불러서 잦은 이동의 원인을 물었다.

“잘 아시잖아요? 그런 직원들요. 자기 몫을 못해서 늘 모든 부서에서 환영받질 못해요.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적절한 피드백 없이 수년을 이 부서 저 부서를 전전하게 한다고? 그 직원은 두어 달 멍하니 고정된 PC 화면을 향해 앉아 있더니 육아휴직을 들어갔다. 최근에 남자직원들이 육아휴직을 들어가는 사례가 많아졌다.

장면 6
원하는 곳에 취업하고 월급 받자마자 독립한 딸 아이는 한동안 돈 쓰는데 정신이 없는듯했다. 첫 월급으로 키워 주신 할머니와 우리에게 크게 쏘는 것까지는 기특했다. 그러나 연중 꼬박꼬박 2번 해외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잘한다는 헤어숍을 골라 다니며 손톱 발톱을 남에게 맡기며 깜짝 놀랄 만한 지불을 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황당했다. “뭐지? 일찌감치 경제관념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꽝 됐네.”

하루는 가끔 들르는 딸아이를 붙들고 대화를 청했다. “월급생활 3년에 얼마나 저축했느냐”고 물었다. 마침 같이 온 친구에게도 물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그 친구는 2000만원을 모았다고 했다. 그래야지. 암 그 정도는 모았겠지. “너는?”하며 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딸은 좀 당황하며 솔직히 말했다. 200만원이요. “뭐라꼬? 200만?”

친구가 부모와 같이 사니 주거비가 덜 나가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딸의 200만원은 너무했다.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딸에게 물었다. “지금의 생활이 계속되면 5년, 10년 후의 너는 어떤 모습일 것 같으냐”고.

딸은 월급 모아 결혼자금, 주택마련, 자녀 교육자금을 충당하기 불가능한 이 시대에 저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했다. 이른바 ‘티끌 모아 티끌’이란다. 말로만 듣던 밀레니얼 세대, 삼포세대가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우리는 회사에서, 집에서 밀레니얼을 만난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책들에 의하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인류란다. 소위 ‘신인류’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세상을 손안의 모바일로 접한 그들은 사고회로가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한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회사에서의 당연한 권리에 눈치 보지 않으며 꼰대들의 형식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거의 종신고용이 보장되었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자신의 성장과 보다 높은 급여를 향해 주저 없이 회사를 이동한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가 꼰대 월드임을 안 순간 그들은 입을 다문다. 자신의 업무와 그에 따른 평가에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는 조직 앞에서 그들은 회사를 떠날 꿈을 꾼다.

적은 월급에 맛집을 찾아다니며 가심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 비록 어릴 때는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지만, 경제팽창이 멈추고 하강하는 지금 이때 사회에 던져진 밀레니얼. 노력의 열매를 가져 보지도 못한 채 상실감을 먼저 느껴야 하는 그들에게 우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회사에서, 집에서 만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뻔한 잔소리를 늘어놓기에는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불안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도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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