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인의 좌충우돌 사회적응기(8)

이서인 시인(여자 정훈장교 1기)
이서인 시인(여자 정훈장교 1기)

지난달 부동산 거래를 할 일이 생겨서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다. 그동안 이사를 다녔던 주소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주민등록표는 3장이나 되었다. 현재 주소지는 34번으로 그 안에는 그동안 수십 번 이사를 다닌 내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음 달 초에는 35번째 이사가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군인 출신 중에는 나보다 더한 이사 전력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군인들은 2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기기 때문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퇴직을 하면서 용산에 정착한 것이 고향인 춘천으로 가기 위한 기착점이었다면 이번의 이사는 경춘선을 따라서 임시 머무르는 경유지인 셈이다.

2년 후에는 춘천으로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고 그렇게 되면 25살에 고향을 떠나온지 35년 만의 귀향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고향에 같이 갈 친구들을 모집 중이다. 혼자서 가면 외로우니 친구들을 만나면 은근히 권고도 한다. “집으로 언제 돌아 갈거니?”

70년 만의 귀향

지난달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유승호씨가 6·25전쟁 제70주년 행사 ‘영웅에게’ 행사에 참석해 헌정사를 낭독했다. 그는 “얼마 전 이 자리에 초대를 받으면서 한 가지 소식을 꼭 전해드리기로 했다”며 “바로 오늘 147명의 국군 전사자분들이 70년이라는 긴 세월의 바다를 건너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이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그분들 속에 계실지도 모르는 저와 같은 나이의 어느 국군을 향해 짧은 편지를 띄우고자 한다”며 “친구에게. 허락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친구라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 형식의 글을 읽어내려갔다.

“친구여. 갑작스러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서던 순간,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서둘러 따듯한 밥을 짓던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서며 얼마나 목이 메셨습니까. 당신이 지켜낸 땅 위에서 우리는 또 이렇게 윤택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친구여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이 날 6·25 참전용사인 류영봉씨는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하여 유해로 돌아온 전우들을 대표하여 떨리는 손과 음성으로 대통령께 복귀 신고를 했다.

그러나 70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미귀환자가 12만 3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의 귀향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 여군 선배님께 경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집에서 머무르는 날이 많아지면서 TV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6월에는 6·25전쟁 70주년 기획 프로그램이 많이 방송되었는데 그 중 내 눈을 확 사로잡은 장면이 있었다. 채널A 침묵 예능 ‘아이콘택트’이다.

이날 눈맞춤 주인공은 참전 여군 두 명이었다. “저는 김명자입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한국 최초의 여자군인입니다.” 그는 여자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정훈장교로서 적진에서 들어가 항공기에서 전단을 살포하며 아군의 승리를 도운 참전용사였고,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고 했다.

김명자 씨는 “6·25 때문에 여군이 창설되었다. 의용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모집에 응시를 했는데 400명이 지원해 200명만 선발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때가 19살이었는데 17, 18살에 시집가던 시절이다. 19살이면 올드 미스였다. 여자는 왜 이렇게 차별을 받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전쟁이 나고 여자도 필요로 하니까 군대를 가게 됐다”라며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했다고 밝혔다. 

그가 눈맞춤을 한 상대는 군복을 입고 등장하여 김명자 씨에게 “충성!”이라고 인사했다. “저는 심용해라고 합니다. 6·25 전쟁에서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심용해씨는 “16살에 입대해서 3년 7개월을 있다가 왔다”고 했다.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1949년에 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비정규전 부대). 작전명은 ‘래빗’. 그때는 켈로의 뜻을 몰랐단다. 당시 아군에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첩보활동으로 알아와야 했다.

그는 “100리, 200리를 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걸어 겨울에는 발이 얼어서…말도 못했다”라며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이후 두 사람은 “잊지 않고 우리가 기억합시다”라고 약속했다.

내가 군에 입대했던 1980년대에도 여군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절이었는데 1950년대는 그 편견이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 어린 소녀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으며 얼마나 두렵고 그때마다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어찌 보면 여자정훈장교 1기로 임관한 나의 직속 선배이신 김명자 선배님과 소녀 첩보대원으로 참전한 심용해 선배님의 결단과 헌신에 감사드리며 존경의 뜻을 담아 경례를 올린다.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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