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7)

천사가 떠나자 산신령이 나타났다

든든한 동행이 되어 주었던 아나스타샤가 휘리릭 떠나가 버리고 나니 갑자기 불안감이 다시 몰려왔다. 나는 지하철역 내부 벽에 붙어 있는 노선 안내도를 보면서 가는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로 했다.

낯선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메이 아이 헬프 유?(May I help you?)”하고 묻는다. 돌아보니 말끔한 차림의 40대 신사가 업무용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2017년 5월 8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은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놀랍게도 진한 페퍼민트 색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사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딸에게 부탁해서 드로잉을 받는 순간 바로 행복한 추억 속으로 되돌아 가서 퐁당 빠져 버렸다. Drawing by 안수빈
2017년 5월 8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은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놀랍게도 진한 페퍼민트 색깔이었다. 사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딸에게 부탁해서 드로잉을 받는 순간 바로 행복한 추억 속으로 되돌아 가서 퐁당 빠져 버렸다. Drawing by 안수빈

내가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까지 간다고 하니 자기도 그곳으로 간다면서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승객들이 붐벼서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다만, 짧은 대화를 통해 그가 무역업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현지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경험이 있어서 자기도 외국인을 보면 도와준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총총걸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민스크 벨로루스카야 기차역을 향해 떠나갔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야!’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려고 온 전령사 같았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지하철 역사를 나서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깜짝 환영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5월인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게 아닌가.

지하철역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서쪽 방향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인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이 보였다. 러시아에서는 종착지 역의 이름을 앞에 붙이고 출발지 역 이름을 뒤에다 붙여서 이용자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눈발 사이로 보이는 기차역의 오래된 석조 건물의 진한 페퍼민트 색깔이었다. 러시아의 색깔은 회색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컬러였다. 너무나 강렬했다. 뒤통수를 ‘쿵’ 하고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한낮이지만 잔뜩 흐린 하늘 때문에 한밤중처럼 어두운데, 가로등이 켜진 풍경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서울에서 6,613㎞ 떨어진 머나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는 화려한 5월의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황량함에 꽤 실망했었는데 이렇게 멋진 순간 속에 내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참만에 눈이 그치자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미끄러운 광장으로 걸어나갔다. 길을 건너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하도를 오르고 내려야 했지만, 기분이 업이 되어서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러시아는 회색이 아니라 페퍼민트 색이었다. 차가운 얼음나라가 아니라 포근한 눈꽃 나라였다. 곰처럼 크고 무섭고 무뚝뚝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해와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원래 이상한 땅, 이상한 나라는 없는 법이다. 단지 내가 낯설어 했던 것뿐이었다.

2017년 5월 8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은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놀랍게도 진한 페퍼민트 색깔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사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딸에게 부탁해서 드로잉을 받는 순간 바로 행복한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서 퐁당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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