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10)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부모는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녀의 미성숙함에 조급함과 안타까움이 앞서고 일일이 관여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 자녀는 좀 더 빠른 길로, 쭉 뻗은 대로로 갔으면 한다. 그러나 나는 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때론 자녀를 남의 아이 대하듯 하라고 말한다. 그가 대로를 이탈해 좁은 길로 접어들더라도 다시 길을 찾아 나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억지로 끌고 나올 수는 있지만 좀 참자. 모난 길을 스스로 나오는 그 과정 자체가 계속되는 나머지 여정의 자산이다. 정히 아닌 길로 간다면? 막을 수 없거나, 슬쩍 건드려 다른 방향을 보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떻게 슬쩍 건드릴 것인가? 이제 와 돌아보니 나의 방법은 ‘질문’이었던 것 같다. 10살 무렵 전학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아이에게 “너는 새로운 학교에서 어떤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고 싶으니?”라고 물었다.

아이돌에 푹 빠진 중학교 2학년 때는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질문했고 백댄서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방송댄스학원에 갔다. 입시준비가 시작될 때는 ‘시크릿’이란 책을 건네 주며 2, 3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고 2때였다. 딸 아이의 방에서 ‘워런 버핏의 가치투자’라는 책을 발견했다. 당시 펀드 매니저들의 대박 신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책을 보는 이유를 물었다. 자신도 유명한 펀드매니저가 되어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싶다 하였다.

나는 내심 긴장했다. 어쩌다 금융인을 선택한 나로서는 ‘돈’이 기준이 되는 삶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아이와 진지하게 마주했다. 돈은 무척 중요하지만 많은 돈은 행복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PB고객과 그들의 자녀가 떠올랐다. ‘돈’보다는 ‘사람’을 위해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년 후 이 개입이 아이 진로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자 아이는 억눌린 욕구를 맘껏 분출하였다. 놀고먹고 마시는, 학업과는 먼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나 대학입학 전 합의한 엄마와의 약속이 거침없는 욕망분출에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 약속은 경제적 책임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섰으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것에 동의했다. 등록금과 차비 이외에는 스스로 벌어서 충당하기로 했다. 책도 사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멋 부리고 여행도 가고, 돈이 적잖게 필요했다.

아이는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과외는 기본이고 커피점에서 원두도 내리고 결혼식장에서 서빙을 하고 학교의 임상실험에 참가하여 돈을 충당하기도 했다. 집안과 친척집을 돌며 잠자고 있는 물품을 수거해 중고시장에 팔기도 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아빠와 할머니에게 가불하는 눈치였다.

스펙 쌓기에도 바쁜데 알바를 한다 하니 주변에서 나는 좀 이상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돈을 벌고 돈의 가치를 경험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었다.

아이는 지금도 커피를 안 마신다. 아니 못 마신다. 식사 후 습관처럼 몰려가는 유명카페의 커피 한 잔 값이 1시간 알바비이니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알바에 매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이의 대학생활을 내내 지켜보았다. 한참을 논 아이는 졸업 즈음에 고시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알바와 시험준비를 병행하기 힘드니 알바중단과 고시준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어려운 공부를, 그것도 한 해 몇 명 안 뽑는 시험에 모험을 걸다니.

그러다 아이가 고시를 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년 전의 ‘돈’이 아닌 ‘사람’을 위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내전, 난민, 기아, 환경문제에 헌신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꿈을 키워갔다.

당시 국제기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외 석·박사 취득과 외국생활 경험이 필요했다. 단기유학 한번 못 간 아이는 이리저리 알아보다 언젠가 그 길로 갈 수도 있는 공무원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자격을 갖추는 게 불가능하니 바늘구멍을 통과하겠다고?

어쩐지 전공수업은 뒷전이고 유엔, 분쟁지역 역사 등에 대한 수업을 듣고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 큰 생각 없이 관련분야의 후배도 만나게 해주었다. 내가 이미 슬쩍 옆구리를 건드렸던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의 결정에 반대했다. 주변의 고시폐인이 떠올랐다. 부모로서 실패한 아이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이 스스로의 결정과 그에 대한 책임을 외쳤던 나는 이번만은 내 신념을 버렸다. 그새 전투력과 투지를 갖춘 아이는 완강했고 항의와 눈물로 투쟁했다. 남들 다 하는 재수를 안 했으니 그 비용을 내 놓으라고 했다. 헐~, 재수가 벼슬인가? 거의 빚 독촉이었다.

결국 내가 졌다. 속으로는 실패도 좋은 경험이다라고 자위하면서. 단, 두 번 도전으로 합격할 것과 실패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투쟁으로 얻어낸 기회 앞에 아이는 최선을 다했고 약속을 지켰다. 이제와 생각해 본다. 그때 내가 쉽게 허락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무원이 되고 월급을 받자 아이는 대번에 독립을 선언하고는 춤을 추며 집을 떠났다. 고약한 엄마에게서 벗어남을 자축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정답은 없다. 타고난 성향도 분명 존재하고 가정의 상황과 부모의 기질도 다 다르다. 나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다소 과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외형적인 결과는 좋았지만 후유증도 있었다.

소신은 변함없으나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때론 신념과 원칙이 사랑을 가렸다. 딸아이에게 모성애를 의심받기도 했고 아이에게 어른의 책임을 지우는 냉정함으로 원한(?)도 샀다.

딸아이는 종종 “나는 엄마의 부하직원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외치곤 했다. 아이의 성장에 맞추는 지혜가 부족했고 사랑의 표현도 서툴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를 두고 흔들리며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첫째, 있어도 풍족하게 키우지 말자. 부족함, 결핍은 아이가 스스로 방법을 찾는 원동력이다. 부족할 사이 없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부모로 인해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진화론의 이론을 들이대자면 풍족한 아이들은 무엇이 퇴화할까?

둘째, 때론 남의 아이 보듯 하자. 좀 거리를 두고 가자. 바싹 붙어 가면 부모도 길 저편을 보기 힘들다. 자녀의 더 큰 장애물은 어쩌면 부모 자신이다. 이 거친 세상에 내 아이가 뒤처질까 하는 불안함과 그 조급함으로 업고, 안고 가려 한다. 다소 떨어져서 아이가 가는 방향을 멀리 보며 때때로 슬쩍슬쩍 건드리자. 나는 ‘질문’으로 아이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곤 했다.

셋째, 우리가 넘치게 주어야 할 것은 사랑이고 갖추어야 할 것은 지혜로움이다. 나는 아이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랑표현에 인색했고 매사 지나침으로 반발과 원성을 샀다. 아이가 부모를 뛰어넘어 그 사랑을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학에서 교육학을 수강하던 중 딸아이는 나의 부모교육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과를 요구했다. 나는 정식으로 크게 사과를 했다. 부족해서, 서툴러서 미안했다고. 그래, 딸아! 이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도 이제 너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겠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아이를 낳든 말든.

아! 다 지났으니 이렇게 말하지만, 이 땅에서의 자녀 교육,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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