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6)

공항 철도 티켓 구매에 실패하고 꼰대 본성이 나오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구간도 러시아 국내선 저가 항공기를 타고 갔다. 요금이나 시간을 따져 보니 기차보다 비행기의 가성비가 훨씬 좋았다. 마침 검색하다가 다음날 출발하는 싼 가격의 S7이라는 항공사의 비행기표를 발견하고 급하게 질러 버렸다.

그리고 나서 우선 숙소만 예약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교통편은 제대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공항은 어느 나라나 영어 안내 데스크가 있으니 물어서 가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떠났다.

모스크바에는 세 개의 공항이 있었다. 그 중 시내에서 42㎞ 거리에 있는 도모데도보공항에 내렸다. 2017년 5월 8일, 이 날의 미션은 공항에서 예약한 숙소와 가까운 민스크 벨라루스카야역까지 가는 것이었다.

모스크바공항철도
모스크바공항철도

먼저 아에로 익스프레스라는 공항 철도를 타고 빠벨레프스키역까지 가야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거기서 지하철로 바꿔 타고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별로 어려울 건 없다고 생각했다.

공항 열차 티켓을 사기 위해 창구로 가서 여직원에게 “플리즈 원 티켓 투 빠벨레프스키 스테이션(Please, one ticket to pabelepsky station)”이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종이에 적어 온 기차역 이름을 보여 줬지만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과 몸짓을 할 뿐이었다.

내가 반복해서 말하자 창구 너머의 중년의 여성 직원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화가 난 사람처럼 큰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뱉어내며 저리 비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머릿속의 보디랭귀지 번역기를 급하게 돌려 보았다. “귀찮게 하지 마라. 네가 말하는 거 전혀 못 알아먹겠다. 저리 꺼져라. 짜증 나게 하지 마라”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경험상 오래 버텨 봐야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서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어로 된 안내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도 없었다. 난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모스크바 길 안내도
모스크바 길 안내도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봤지만 뾰쪽한 대책이 없었다. 미운 마음에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너희는 러시아가 아직도 강대국인 걸로 착각하고 정신 못 차리고 있구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에 뒤처지면 절대 잘 살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구나. 쯔쯧쯔.”

그러다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러시아를 평가하고 가르치러 온 것도 아닌데, 제코가 석 자나 빠진 주제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놈이 다리 위에서 웃는 놈 배꼽 보인다고 나무라는 격이었다. ‘철저히 알아보고 준비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영어 먹통이라고 러시아 사람을 탓하면 안 되지’ 하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꼰대는 항상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꼰대로 살지 않겠다고 울타리 밖으로 나섰는데 제 버릇 개 못 주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한심했다. 꼰대가 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버릇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험난하겠지만 그것보다도 꼰대 탈출은 더 어렵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 아나스타샤를 만나다

한참을 흡연장에 서 있었지만 선뜻 기차역으로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감한 마음으로 서성이고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와 “담배 한 대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담배를 얻어 피우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젊은 여성이 영어로 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건 뭐임? 영어 하는 사람? 혹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내가 담배를 한 개비 주면서 상황을 설명하자 자기도 공항 철도를 탄다고 하면서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식사를 못해서 요기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해서 같이 스낵바에서 감자튀김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사는 대학생이고, 친척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감자튀김 값을 내겠다고 하자, 각자 내면 된다면서 사양했다.

19살의 러시아 여대생 아나스타샤의 뒤를 따라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다시 기차역 창구로 가서 표를 구입했다. 그녀는 아에로 익스프레스는 2002년도에 만들어졌고, 시내로 가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기차 안은 우리나라 고속철(KTX)과 구조가 비슷했다.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해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별로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다 보니 어느새 종착역에 도착했다.

빠벨레프스키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지하철역이 있었다. 지하철 플랫폼은 에스컬레이터로 단번에 연결되는데 깊이가 100m도 더 되어 보일 정도로 깊었다.

내가 놀라워하자 아나스타샤는 “모스크바의 지반이 약해서 단단한 바위층이 있는 깊은 지하까지 판 것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냉전시대 핵전쟁에 대비해서 깊이 판 거라고 하던데, 설명이 달랐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끄덕여 주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안전문이 우리나라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문이 아니라 칙칙한 색깔의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플랫폼과 지하철 차량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어 보이지 않았다. 안전문이 열렸다가 닫힐 때마다 ‘덜커덩 꽝’하는 소리가 마치 감옥문 여닫는 소리 같았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지하철을 타는 방향이 반대였다. 그녀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의 통로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 떠나갔다. 천사가 ‘펑’ 하고 나타났다가 돌아갈 시간이 됐다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작별이 너무 아쉬웠다. 또 한 번의 행운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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