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온 고향 남겨진 이야기’(3) 해주시 편(하)
노경달 행정안전부 이북5도위원회 사무국장

푸른 벽계수가 바위에서 미끄러지듯 흰 거품을 뿜다
 
해주 출신 이북도민에게 ‘두고 온 고향, 남겨진 이야기’를 물었더니 하늘이 허락하면 백령도에서도 보인다는 해주의 수양산을 자랑하면서, 수양산 아래에 있다는 사미정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학이 나래를 펼치고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모습의 정자라고 했다. 아름다운 계곡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가 사방으로 보이는 정자라 하여 예로부터 그 이름을 사미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 소녀였다는 또 다른 해주인은 구슬같이 맑고 푸른 벽계수가 바위에서 미끄러지듯 흰 거품을 내뿜는다는 사미정이 있는 그곳, 해주에 모교가 있었다고 전했다. 부픈 마음을 키워준 내 고향 해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렌다고 했다.
 
혼례엔 면포 3필, 쌀 5말로써 돕는다
 

벽계수가 미끄러지듯 쏟아져 하얀 거품으로 부서지는 모습과 어우러져 선경을 선사하는 사미정. 그 아름다운 모습이 사방에서 다 보인다는 의미에서 사미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출처:황해민보
벽계수가 미끄러지듯 쏟아져 하얀 거품으로 부서지는 모습과 어우러져 선경을 선사하는 사미정. 그 아름다운 모습이 사방에서 다 보인다는 의미에서 사미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빛은 바랬지만, 절경은 감출 수 없다. 출처:황해민보

물 좋고 산 좋은 해주지방 인심과 넉넉함은 해주향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규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주인들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해주지역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예방하고 해결해 나가는 실천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령, 혼례에는 면포 3필, 쌀 5말로써 돕는다. 또한, 무릇 경사스러운 일에 기증할 일이 있으면 예의 크고 적음에 따라 예물의 다소를 정하는데, 많으면 면포 5필, 쌀 10말을 하고, 그다음은 면포 3필, 쌀 5말로 하며, 적으면 면포 1필, 쌀 3말로 했다.

이를테면 당시에 장원급제, 진사 생원, 아들의 관례, 처음 하는 벼슬, 승진 따위 등 유형에 따라 차이를 두고 정했다.

돕는 기준이 최소한 쌀 5말 수준이었으니, 요즘 혼자서 살림하는 1인 가구용 쌀 1kg짜리를 5000원 상당으로 계산하면, 쌀 5말로 혼례를 돕는 기준액은 20만원 상당이다.

예로부터 서로의 관계에서 사랑이나 인정이 많고 깊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온 도타운 인정은 오늘날 이북도민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의 ‘이북도민 사랑의 마스크 만들기 운동’이 현대판 향약을 만들어서 실천한 대표적 사례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지난 3월, 3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15일간 참여해 일회용 필터 장착이 가능한 살균 소독 면마스크 6200장을 만들어 대구·경북 지역 등 전국의 이북도민 및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평소에 도타운 심성을 간직한 정과 의리를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 정신이 깃든 해주향약이 덕업과 예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해 교화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수평적 오륜 덕목의 실천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급해 왔듯이 오늘날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랑의 마스크 나누기 운동은 21세기형 사회공헌 향약으로 길이길이 기록될 것이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공통점은 해주 출신이라는 것
 
1. 일 두 없는 일진회가
2. 이 세상에 생겨나니
3. 3천리 강토 다 팔아먹고
4. 사살만 남았다
5. 오사리 잡것이 모여들어
6. 육조백관 차려놓고
7. 칠칠치 못한 잡놈들이
8. 팔뚝질만 하는구나
9. 구구히 생각하니
10. 십퍼런 도둑놈이다


해주지방에서는 구한말 친일 매국노 집단을 비난하는 ‘십진직 동요’이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 말과 귀로써 전해지는 노랫말이다.

황해도가 낳은 독립투사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김구 선생. 출처:황해민보
나라를 위해 일평생을 바친 독립투사 김구 선생도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출처:황해민보
해주가 배출한 호 한분의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출처:황해민보
해주가 배출한 호 한분의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출처:황해민보

소 먹이는 목동들까지도 불렀다는 이 동요는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에 적극 협력한 매국단체 일진회를 비난하는 동요로 전해오고 있다.

김구와 안중근은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의 등불이요, 탁월한 리더십이 넘치는 위인이다. 두 사람 모두를 황해도 해주에서 배출하였으니, 오늘날 황해도 해주시 중앙시민회가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도 1953년 휴전이 된 뒤에 다시 뭉칠 수 있었던 지혜로운 저력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맛의 비결은 손맛…해주의 그 맛은 어머니 맛이지요
 
고향 음식을 생각하면, 가장 잊을 수 없는 ‘저잣거리’의 풍성하고 싱싱한 해물이라고 하면서 어머니 손맛이 담긴 교반이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군침을 삼키며 해주 고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 해주시민의 표정이다.

흰밥을 큰 대접에 담고 그 위에 민어 어전과 쇠고기 및 표고를 썰어 볶아 놓고 숙주, 호박, 고사리, 미나리, 고비 등을 얹어 놓습니다. 때로는 청포와 도라지도 곁들이고 선지 익힌 것을 첨가할 수 있다고 했다. 

비빕밥은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 맛이 당연히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해주교반은 밥 위에 닭고기와 여러 가지 나물 등을 얹어서 만드는 비빔밥으로 알려져 있지만, 해주시민에게 직접 설명을 들어보면, 맛의 결정적인 비결은 손맛이요. 그 맛이 어머니 맛이라고 했다.

오늘은 서둘러 퇴근을 해야겠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 그리고 참기름을 떨구어 비벼서 먹지만, 바지락, 대합 국물을 함께 먹어야 진미가 난다고 친절히 알려주신 해주 교반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진다. 해주시민들이 가꾸어 온 전통의 멋은 풍길 수 없지만, 가족들에게 이북요리 솜씨를 날려봐야겠다.
 
이북도민의 정신적 지주 이북5도위원회
 
이북5도위원회는 고향 떠난 이북도만들에게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미수복 시·군의 명예시장·군수는 국가공무원법 제33조 각 호의 어느 하나에도 저촉되지 말아야 합니다.” 

박성재 황해도지사(차관급)가 명예시장·군수를 추천하면서 그들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명예시장·군수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고, 통일과업에 열성이 있는 사람 중에서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이 추천하면, 행정안전부장관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경유해 대통령이 3년간 직무를 맡긴다.

현재 해주시 이욱환(72세) 명예시장을 중심으로 해주시에는 12명의 명예동장(선파동장 김경수, 율왕동장 이양희, 석계동장 최훈, 광옥동장 이수환, 해백동장 전은화, 시연동장 박성준, 태부동장 최광호, 장구동장 오영철, 남양동장 송우학, 용동동장 이재호, 동양동장 오택림, 청풍동장 고영애)이 그 직무를 수행한다.

이들은 고향 얘기만 나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다. 명예직이지만, 본업보다 더 열심히 참여하고, 나눈다.

“고향 사진이라고는 단 한 장도 없습니다.” 해주시 이욱환 명예시장(72·제35대 해주시 중앙시민회장) 얘기다. 필자가 ‘두고 온 고향, 남겨진 이야기’에 담을 수 있는 사진 한 장을 요청한 것인데, 아쉬운 표정이 느껴지는 사연을 듣고 보니 너무나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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