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4)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블라디미르 과장을 만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 번째 날,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역을 찾아갔다.

기차역 매표창구에 가서 예매를 하려고 했지만, 전혀 불통이었다. 창구의 직원은 육중해 보이는 전형적인 중년의 러시아 여성이었다. 그녀는 고객을 위해 뭔가를 해 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도리어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이럴 땐 일단 후퇴다.

역에서 나와 기분 전환을 위해 바다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부두 쪽으로 걷다 보니 러시아-한국 여객선 회사 간판이 보였다. 다행히 영어를 하는 남자 직원을 만났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기차표를 사러 갔다가 말이 안 통해서 그냥 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아무리 내가 말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어도 당신은 기차표를 사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다시 육교를 건너 함께 기차역으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 전망대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다. 별로 볼게 없는 도시라서 이 금각교가 관광 코스 중에 하나로 들어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 전망대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다. 별로 볼게 없는 도시라서 이 금각교가 관광 코스 중에 하나로 들어가 있다.

대화하는 중에 그가 한국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여객선 회사의 과장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였다. 설악산, 춘천, 서울, 부산 등을 가봤다면서 한국에 대해 호감을 보였다.

그는 직접 구매해 준 기차표를 건네주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하바롭스크행 야간열차고 2등 칸 4인실의 2층 자리, 요금으로 2400루불(약 4만 8000원)을 지불했는데, 약 14시간 정도는 걸릴 겁니다.”

블라디미르의 도움을 받아 기차표를 무사히 예매했으니 곡절은 있었지만, 이날의 미션도 성공이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그냥 인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을 기차에서 비행기로 바꾸다

원래는 기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할 계획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이르크추크 그리고 바이칼 호수–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구간은 기차 타는 시간만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 한 도시에서 2-3일씩만 머문다 해도 최소한 2주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기차로만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하려면 총 3주 정도를 잡아야 한다.

시베리아횡단열차 2등실은 복층 구조인데 4개의 의자가 있다. 밤에 잘 때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서 침대로 바꾼다. 중간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가 제공된다. 객차 마다 공동 화장실이 하나씩 있다. 화장실 맞은편에 온수통이 있어서 뜨거운 물을 이용할 수 있다.  컵라면이나 커피를 겨우 끓일수 있는 정도의 온도다.
시베리아횡단열차 2등실은 복층 구조인데 4개의 의자가 있다. 밤에 잘 때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서 침대로 바꾼다. 객차 마다 공동 화장실이 하나씩 있다. 화장실 맞은편에 온수통이 있어서 뜨거운 물을 이용할 수 있다. 컵라면이나 커피를 겨우 끓일수 있는 정도의 온도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횡단열차를 타보고 나서 상당히 실망했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시베리아가 아니었다. 내 여행 스타일에도 맞지 않았고 시간도 아까웠다. 미련없이 나머지 구간은 러시아 국내선 여객기를 타기로 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4월의 시베리아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잔뜩 흐린 하늘, 황량한 땅과 검은빛으로 변한 하천,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들, 낡은 집단 주택들. 질퍽거리는 농로와 메마르고 작은 자작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자연도 그렇지만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도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이등석을 탔는데 40대 러시아 남성 세 명과 같은 칸을 썼다. 그들은 밤새 보드카를 마시고 카드 게임을 하고 몰래 흡연을 하며 떠들었다. 냄새와 소음을 참기 어려워 잠을 설쳤다. 로망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기차로 횡단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미리 음식, 책, USB 등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놀다가 책이나 영화도 보고 쉬면 된다. 하지만, 혼자 여행인 경우에는 굳이 기차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고 싶거나 기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했다는 기록을 세우고 싶거나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동 수단을 바꾼 진짜 이유는 러시아 여행을 빨리 마치고 북유럽 국가나 발트 혹은 발칸 국가를 여행해보고 싶다는 욕심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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