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조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

최영조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
최영조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

“코로나 때문에 손 잘 씻어야 해.” “코로나가 있으니까 어린이집도 못 가는 거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이 우리 사회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위세를 떨치면서 아이들의 일상도 크게 변했다.

생애 첫 바이러스 이름을 수시로 재잘거린다. 외출 후 손 씻으라고 입이 닳도록 말해야 화장실로 향하던 아이들이 이제 코로나를 외치며 비누를 만지작거린다. 어린이집, 유치원이 왜 가기 싫은지 잘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휴원하는 이 마당에 든든한 호재를 얻은 표정이다.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어린이집 보낸다는 협박(?)이 일상이 돼버렸다.

이방 저방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신난 표정과 달리 아내는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낸다. 전문가 상담이 필요할 정도의 우울감도 엿보인다.

생업을 이어나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나지만, 괜스레 아내 눈치만 늘었다. 아내 기분을 전환할 방법에 몰두하다가 금방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급기야 개학이 4월로 연기된 오늘 저녁 아내와 나눌 대화가 벌써 걱정이다. 언제쯤 당연하기만 했던, 그래서 고마움을 몰랐던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나와 내 가족이 마주한 코로나19 정국의 단면이지만,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녀야 하는 모든 가정의 어려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지, 사람이 조직한 삶의 공간, 삶의 방식은 이대로 괜찮은지, 온갖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를 고민해야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느낄 수도 없는 작디작은 바이러스가 지구를 정복했다는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구의 진짜 지배자가 누구인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코로나19 사태를 버티면서 각 개인은 처한 삶의 환경과 여건, 감염병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세계관에 따라 다른 변화를 꿈꾸게 될 것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전환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지만, 이런 변화를 추동할 만큼 코로나19는 강력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의 종식을 선언한 후 최종 집계될 감염자와 사망자의 규모, 세계 경제의 위축 정도 등의 데이터는 인간사의 획을 긋는 대사건이 되기에 충분할 전망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도, 국가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도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야

개인이 팍팍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듯 정부와 국회 등 정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집단은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면서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세계 각 나라가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행사를 제외하고, 요즘처럼 매일 발표되는 수치를 두고 경쟁하는 듯한 모습은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이슈의 무게감만큼 코로나19를 대처하는 각 나라의 역량은 국제적인 언론과 SNS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방역체계와 검사 규모, 뛰어난 시민의식은 모범사례로 소개되지만, 지도자의 정치적 야욕에 초기 대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과 일본, 정부가 손 쓸 수도 없을 만큼 사태가 악화된 이탈리아는 걱정의 대상이 됐다.

공공의 영역을 더욱 튼튼하게

이 지점에서 정부와 정치권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제발 공공성이 지켜져야 할 영역에 시장의 논리를 들이대며 ‘비효율적이다, 민영화하자, 성과평가로 차등을 둬야 한다’와 같은 구시대적 발상은 접어두자.

이번 코로나19 위기에서 국민건강보험과 공공의료시설이 얼마나 소중한지 길게 언급하지 않아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적자를 이유로 폐쇄된 진주의료원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의료민영화. 민간병원확대가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된 요즘이다.

의료 공공성을 지키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다니. 이번에 마스크 수급 문제로 정부를 비판한 정치인이라면, 앞으로 의료민영화 이슈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겠다. 자칫 이념 충돌로 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스스로 공공선을 향해 움직이지 않음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불평등한 재난에 대비해야

또 한 가지는 재난의 불평등성이다. 코로나19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염병이라 누구에게나 위협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히 치명적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 몸이 불편한 장애인, 요양원, 노숙인시설 등 취약계층이 밀집한 공간 등이 그렇다. 자의적으로 거주 공간을 옮길 수 없는 소외된 자들이 머무는 그곳에 국가의 영향력이 더 필요하다. 세심하고 촘촘한 정책수단을 기대한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유연근무, 재택근무, 유급휴가를 권장했지만,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소위 ‘좋은 직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일용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당장 일거리가 없어 생계가 막막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 ‘잠시 멈춤’과는 요원한 사람들이다. 평균의 삶에서 뒤 쳐진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 생애 기간 몇 번의 ‘신종’이 더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이 끝나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담론이 다양하게 형성되었으면 한다.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정책이슈부터 공동체 삶의 방식까지. 사람이 어려울 때 밑천이 드러나듯이 국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기회에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위해 서로의 중지를 모아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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