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7)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신혼 초였다. 여느 맞벌이 부부처럼 주말에는 밀린 가사일을 했다. 나는 주로 음식과 관련된 것을, 남편은 세탁과 청소에 관련된 것을 맡아서 했다.

나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웃통을 벗고 엉덩이를 번쩍 들고 거실을 물걸레질하고 있었다. 남편은 갑자기 뒤를 싹 돌아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기야. 나 이쁘지? 매일 이렇게 도와줄게!”라며 힘차게 걸레를 밀었다.

도와준다는 게 선택, 그건 아니다.

순간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참 잘하고 있어. 근데 도와준다는 생각이면 하지마. 도와준다는 것은 선택이야. 이게 바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계속 해줘.”

그때나 지금이나 옳은 소리를 참 재수 없게도 했다. 순간 남편은 머쓱해지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번쩍 들었던 엉덩이도 차츰 처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청소와 세탁은 남편의 일로 고정됐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남편은 그때를 회고했다. 참 무서웠다고.

신혼 초의 달달한 관계에 꼭 그렇게 찬물을 부어야 되었냐고? 하나 당시 나는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남편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가사일 분담을 선택게 할 수는 없었다.

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남자의 야근은 당연했고 여자의 야근은 양보된 시대였다. 아이가 태어나서도 육아는 여자와 친정의 몫이었다. 거기다 가사일까지 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워킹맘들이여! 그새 생활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워킹맘의 하루, 남편은 어디에?

워킹맘의 하루를 그려보자. 아침에 식사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화장을 하고 출근준비를 한다. 눈도 못 뜨는 아이를 깨워 의자에 세워두고 밥을 먹이며 옷을 입힌다. 둘러업고 아이를 어른댁, 또는 제2의 장소에 데려다 주고 종종걸음으로 출근버스를 탄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 아이를 맡은 사람한테 수시로 소식이 온다. 열이 난다, 병원 가야 된다. 찾는 물건의 위치 등등. 복도에 나가 전화를 주고받으며 다시 책상.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일의 속도를 낸다.

집에 와서는 아이를 씻기고 간단히 청소를 하고 다음날 먹거리를 손질하거나 새벽배송 사이트를 방문한다. 틈틈이 내집마련 정보를 수집하고 목돈마련을 위해 적금을 비교하고 자동대출한도를 알아본다.

자. 이런 일상에서 여러분의 남편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라고? 2019년 12월 KB금융그룹에서 발간한 ‘2019 한국 워킹맘보고서’를 보자.

배우자의 지원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고서에 의하면 워킹맘의 95%가 자녀 문제로 퇴사를 고민한 적이 있다. 또한, 워킹맘은 가정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배우자의 지원과 이해’를 91%로 꼽았다. 20대도 이 비율은 87%이다. 부부의 소득도 워킹맘이 관리하는 비율이 78.3%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도 워킹맘들의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자녀를 케어하지 못하는 데에 따른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갈등한다고 한다. 그녀들의 배우자들도 자녀케어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

이 보고서에는 심기를 불편하게 대목이 있다. 왜 그녀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서 ‘배우자의 지원과 이해’를 1순위로 꼽았는가. 지원은 주체가 되는 어떤 것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은 지원과 이해를 하는 조력자가 아니다. 함께 하는 당사자이다.

남편과 역할 재설정하기. 눈물 없이!

최근 한참 아래 후배가 찾아왔다. 긴 연애 끝에 결혼한 후배 부부는 서로 같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캠퍼스 커풀인 그들 부부 중 내 후배는 남편보다 학교 때부터 여러 면에서 앞서 나가고 인정도 받았다. 결혼 후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쩐지 뒤처져 가는 자신을 느낀다. 남편처럼 직장 일에 몰입하기에는 육아와 가사일 분담이 80% 이상이었다.

점차 쌓여 가는 불만으로 서로 간 말이 곱지 않게 오고 갔고 그럴 때마다 짜증과 눈물로 끝나곤 했다. 나는 우선 이 상황에 대한 그녀의 감정에 대해 눈물 없이 대화할 것을 조언했다.

짐작대로 남편은 부인의 가사일 과다와 이것이 사회생활에서의 위축까지로 이어짐을 모르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요구사항을 이야기토록 했다.

남편도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 자신의 역할을 정하고 가사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후배는 놀라워했다. 남편의 변화도 놀라웠지만 그걸 꼭 말로 해야 안다는 사실도 놀랐다 한다.

그렇다. 상대는, 특히 남자들은 표현하고 요구해야 비로소 안다. 격앙된 상태보다 평정심을 가지고 요청할 때 그들은 이해하고 나선다.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아이가 있다 보니 집안은 늘 어지럽다. 정리와 청소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워킹맘의 차지이다.

일단 정리와 청소를 멈추자.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어 남편이 나서기까지 말이다. 자연스레 청소가 그의 일이 되게 하자. 이제 와 돌아보니 내게는 이런 지혜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후배들이여. 지금 배우자와 편안한 역할분담을 하고 있는가. 혹시 처음부터 그 관계 형성을 놓쳤는가. 그럼 지금 하자.

100세 시대에 어쩌면 이 남자와 70년 이상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늦은 때란 없다. 물론 시간이 경과 할수록 거쳐야 할 푸닥거리는 많다.

나의 이런 조언이 많은 후배에게 쓸데없는 잔소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다시 한번 외친다. 후배들이여! 남편에게 도와달라 하지 말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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