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3)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샐리와 함께한 러시아 여행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란 우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계속 거듭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샐리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주인공 맥 라이언이 엎어지고 넘어져도 결국에는 모든 게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나는 제대로 된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러시아를 향해 떠났지만, 여행 내내 샐리의 법칙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러시아는 과거에 공산주의의 종주국, 냉전 시대의 주역이었던 소련이었다. 좋은 기억이나 친근감보다는 나쁜 기억이나 거부감이 더 많았던 나라다. 특히 소련이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우리나라 민간 여객기가 한밤중에 격추했던 사건은 경악 그 자체였다.

나에게 러시아를 색깔로 표현하라면 음습한 회색빛이었다. 사람들도 무섭게 생기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무지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두려운 느낌으로 첫발을 내디딘 러시아에서 고마운 사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러시아는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러시아의 맨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맨 서쪽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만㎞가 넘는 먼 길을 샐리가 함께 해주었다.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마자 폭풍우를 만나고 어떤 사람은 순풍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러시아 여행 초반부터 순풍을 만났으니 운이 좋은 항해자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첫날,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을 안고 첫 여행지인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내렸다. 인터넷을 보고 공부한 대로 유심카드부터 사고, 우선 사용할 소액을 루블화로 환전한 후 공항 안내 데스크에 물어봐서 시내로 가는 버스까지는 별 문제없이 탔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를 찾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지도와 구글맵을 보면 바로 근처인데 내가 예약한 숙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변은 깜깜해졌다.

골목 안에 있어서 찾기 쉽지 않았던 사쿠라 호스텔. 연립주택처럼 챙긴 3층 벽돌집이다.
골목 안에 있어서 찾기 쉽지 않았던 사쿠라 호스텔. 연립주택처럼 챙긴 3층 벽돌집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등에는 배낭을 짊어지고 노트북과 카메라를 메고 몇 시간 동안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니다 보니 나의 행색이 너무 눈에 띄어 범죄의 타깃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가로등이 제법 밝은 골목길에서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러시아 현지인 한 사람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건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도를 보여주면서 “사쿠라 호스텔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앞장서 걸었다. 조금 걸어가더니 깜깜한 골목 안에 있는 낡은 건물 앞에 멈추었다. 현관문을 열면서 여기가 맞다는 제스추어를 해보인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니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주변은 어둡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 정도가 아니라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러시아인으로부터 달아나다 만난 고려인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찾아보자고 다른 쪽의 골목 들어갔다. 어둡고 좁은 뒤편에서 갑자기 “어데를 찾습네까.” 하는 강한 톤의 한국말이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북한 사람들도 많다는데 혹시…’하는 걱정이 들었다. 상황이 절박했지만 일단 경계심부터 생겼다. 조심스럽게 숙소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호스텔이어서 내부는 좁고, 주방은 주인과 함께 써야했지만, 야식을 챙겨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첫날 짜파게티로 저녁을 준비 중이다.
가정집을 개조한 호스텔이어서 내부는 좁고, 주방은 주인과 함께 써야했지만, 야식을 챙겨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첫날 짜파게티로 저녁을 준비 중이다.

그가 휴대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하니 세 번째 시도 끝에 연결이 됐다. 젊은 남자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앞장섰다.

나는 걸으면서 우선 신원 확인부터 했다. 고려인이고 현재 러시아 해군 극동사령부 예하 부대에서 근무하며 5월 9일 러시아 전승기념일 퍼레이드에 차출되어 왔다고 했다. 그는 나를 숙소에 데려다 주자마자 부대로 복귀해야 한다면서 바쁘게 떠나 버렸다.

내가 다섯 번 씩이나 캐리어를 끌고 지나쳤던 골목 맨 안쪽의 낡은 건물 3층에 사쿠라 호스텔이 있었다. 작은 빨간색 네온이 연립주택 같은 건물의 3층에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공포의 끝은 행운…자신감이 생겼다

러시아의 첫날,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이 지나자 신고식을 잘 마쳤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골목 안에 있는 연립주택처럼 생긴 벽돌건물의 3층이 사쿠라 호스텔이었다. 키릴 문자로 쓰여 있는 작은 빨간색 네온사인이 호스텔 간판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긴 내가 직접 인터넷으로 예약한 것도 처음이고 호스텔이라는 숙박업소도 처음이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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