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5)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25세에 지금의 회사에 들어갔다. 열심히 일도 했고 회식도 1차, 2차, 막차까지 쫓아다녔다. 사실 회식은 즐기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술체질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태어나서 꽃등심과 생선회, 홍어회를 처음 먹어 보았다. 단고기에도 도전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많다니…. 세상은 넓고 먹을 건 많았다. 아주 신났었다. 몸 안 가리고 일하고 술까지 잘 먹는다고 예쁨도 받았다.

씩씩하게 동분서주하며 사원에서 대리가 되었고 그 즈음은 술고래가 되었다. 심지어 이름도 ‘설’에서 ‘술희’로 불렸다. 과장이 되고 더욱 열심히 일하며 남보다 빨리 지점장이, 부장이 되었다.

발탁해준 조직에 고마워서 더욱 힘껏 일했다. 그러나 그때부터였다. 뭔가 삐거덕거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상사가 호출했다. “팀장 때 워낙 잘해서 부장시켰는데 어째 생각한 것과 다르네. 뭐가 문제지?”

부장 승진 직후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달 동안 주말마다 자료를 한 보따리씩 집으로 싸가지고 갔다. 튀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프로모션도 했다. 부하직원들 결재도 눈이 물러질 정도로 꼼꼼하게 검토하여 완벽을 기했다.

직원들에게도 편애 없이 공정하게 대했다. 매사에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고 조그만 일에도 정직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억울했다. 그런데 왠지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옆을 돌아봤다. 남자부장들, 그들은 참 여유로 왔다. 일에 대한 평가는 딱히 탁월하지는 않으나 무난하고 사람 좋다는 평이었다. 직원들과도 무난했고 주변 부장들과 임원들의 세평도 좋았다.

반면 나는 누구보다 철저히 업무를 했고 잘못된 관행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 처리에 있어서는 점점 더 완벽을 추구했고 팀원들에게 최선을 요구했다. 승진 전의 나처럼 말이다. 하루가 너무 짧았고 타부서와 교류의 여유도 없었다. 일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나만 일하고 있었다. “어차피 부장이 다 고칠 텐데 대략 해서 올리자. 우린 시키는 대로 하자.” 내 직원들은 팔짱을 끼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세평도 바뀌었다. 일 잘하고 합리적이기는 하나 융통성 없고 깐깐한 사람으로 말이다.

이렇게 계속 가면 그녀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동료 남성부장들은 착착 올라가고 심지어 여성후배들에게 추월당하고 어느새 임원승진 풀에서는 빠져버린다. 내 주변의 일 잘하는 여성 리더들이 걷는 길이다. 나도 그랬다.

조직생활에서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일 잘하는 것 말고 더 무엇이 필요한가? 어떤 사람이 계속 승진의 사다리에 있는가?

일, 관계, 그리고 승진
일, 관계, 그리고 승진

위는 33년 조직생활 결과 깨달은 바를 딱 한마디로 표현한 표이다. 신입 때에는 업무 익히기에 바쁘다. 모든 게 처음이고 익혀야 할 지식과 프로세스가 많다. 일:관계를 보자면 9대 1 정도이다. 차·과장이 되면 일:관계가 대략 7대 3, 부장이 되면 5대 5 또는 4대 6으로 역전된다.

이미 조직 내에서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구성원들을 움직여야 하고 옆 부서와 협업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임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필요할 때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가?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에서 이미 인간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상당 부분은 감정과 평소의 관계 형성이 작용한다. 머리 박고 일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

여성들은 대부분 일 중심이다. 그래서 초기에 상사들은 여성들의 일 처리에 만족한다. “정대리는 일을 참 깔끔하게 해와, 내가 손 볼 필요도 없지.”

여성들은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주변직원이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남성들 말이다. 매일 술 마시고 근무시간에 집중하기보다 이 부서 밑바닥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노닥거리는 게 거슬린다.

그러면서 고과는 먼저 챙기고 승진도 먼저 한다. 조직의 합리성도 의심해 본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삼으려 한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점차 날카로워지고 피해 의식도 커져간다. 어느덧 그녀는 실력은 있으나 너무 원리 원칙적인 사람,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 그래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되어간다.

왜 그럴까? 우선 남성들을 생각해 보자. 나는 그들의 DNA에 팀 단위의 활동과 협업 능력이 장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냥과 채집이 생존의 방법이었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같이 사냥을 하며 공동의 위협 앞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분위기 파악에 민감하고 때론 강한 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한마디로 관계 형성에 타고났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주변을 살피느라 어슬렁거린다. 남성들이 사냥할 때 여성들도 공동 육아와 식사준비를 함께하지 않았느냐고? 목숨 걸고 하진 않았다.

여성들이여. 올라갈수록 일을 놓자. 내가 안 챙기면 혹시 오류가 있을 거란 강박에서 벗어나자. 오류는 일어날 수 있다. 직원들은 실수와 함께 성장한다. 내가 모든 일을 챙기면 그들의 성장은 그만큼 늦어진다. 그리고 나는 점점 지쳐간다. 여성들이 흔히 놓치는 것이 리더십 체인지이다. 이제 실행자에서 촉진자, 조정자, 협상가로 변하자.

일이 무엇일까? ‘일=직무’라는 1차원적 산수계산으로는 부장이, 아니 팀장이 한계다. 일은 직무와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올라갈수록 관계의 비율이 커진다는 것을 알자.

관계가 일과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풀어야 할 과제를 위해 사람을 움직이고 누군가와 협업하고 때론 갈등을 해소하는 것 자체가 일이다. 그러니 관계가 곧 일이다.

얼마 전 후배가 찾아와 투덜거렸다. 일은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하고 대충 묻어가려는 동료는 딱 질색하는 후배다. 평소 옳은 소리를 딱 재수 없이 이야기 하는 게 그녀의 특기이다.

“사람들이 왜 그래요. 제발 저는 일만 하게 해주세요. 다른 것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요.” 일만 하고 싶다고? 후배여 그럴 거면 사표 내고 창업을 해라. 그러데 개인사업을 해도 결국 문제는 ‘관계’일걸? 이미 우린 혼자 살 수 없다.

여성 리더들이여! 문제는 ‘관계’란 말이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시간이 길수록 우리는 점점 좁아진다. 리더라 함은 점점 넓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니 후배들이여! 일하지 말란 말이야.

이 말에 동의하면 오늘 하루 중 동료부장에게 찾아가자. 차 한잔하며 회사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회사 내 야사도 듣자. 나의 고민도 나누고 때론 그의 열 받은 이야기도 들어주자. 언젠가 필요할 때 그들은 내 의견에 한 번 더 귀 기울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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