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희의 썰] ‘이제와 돌아보니’(4)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KB생명보험 부사장

또 한 번의 명절이 지나갔다. 누군가에겐 설연휴는 해외여행의 찬스이고 기다림의 대상이다. 그러나 여성들, 특히 ‘워킹맘’에게 명절은 휴일이 아니라 노동절이다. 언론은 명절 전후를 기해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에 대한 기사들을 단골처럼 쏟아냈다.

올 설에도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명절 전날부터 시댁에 가서 차례 음식 준비하고 끼니마다 그 많은 식솔 밥상을 차리느라 파김치가 되었는데 시어머니가 차례 마치고 하룻밤을 더 자고 가란다. 나는 언제 친정에 가고…. 짐짓 외면하는 남편을 향해 불꽃 같은 눈길을 한번 주고는 말로는 “예’했단다.

아직도 이런 장면이 흔하단 말인가. 베이비붐 세대 세대인 우리보다 시월드와의 관계에서 단연 앞서가는 X세대,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었던가. 세상이 겁나게 변하는데 ‘이쪽 세상은 아직도’인가. 신혼 초의 나의 시월드 생활이 떠올랐다.

28살에 결혼했다. 시댁은 워낙 없는 집안 이었고, 어렵게 작은 연립주택을 소유한 정도였다. 당연히 웬만한 전셋집을 얻어줄 형편은 안 됐다. 당시는 노원구의 18평 아파트 전세로 신혼을 시작하는 게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1평 다세대 주택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그것도 주인이 11평이라 우기는데 아무리 재봐도 8평이 안 됐다. 그나마 시댁이 보태준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은행 대출을 받아 시작했다.

남들 다 하는 집들이를 했다. 남편회사 동료 7, 8명을 집에 들이기가 어려워 안방이자 유일한 방의 침대를 세워서 벽이 붙여 놓고 상을 차렸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작은집의 전셋값도 대줄 형편이 못 되는 배우자를 선택한 나를 보며 대놓고 반대도 못 한 홀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쉬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출발은 이렇지만 몇 년 후면 큰 차이 없다며 큰소리쳤다. 그러나 속으로 아파트 사는 친구들이 부럽기는 했다.

시댁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지라 원망도 없었다. 폐물도 일절 생략하고 전셋값에 보태라고 예단도 현금으로 보냈다. 결혼해서는 수많은 제사를 지내느라 퇴근 후 부리나케 시댁으로 향했다.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사람한테 아낌없이 해주는 스타일이라 시댁에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직장생활도 완벽하게 하고 시댁과의 관계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그러다 탈 날걸. 내가 우리 어머니를 제일 잘 알지. 100을 해드리면 200을 해달라고 할 걸.”

초기에는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은 아니라도 상대도 마음을 여는 게 세상 이치지. 그러나 얼마지 않아 남편 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나도 예물을 받지 않았는데 시어머니는 결혼 후 모피코트와 공단이불을 못 받았다고 온종일 우셨다. 본인 입성이 초라하다 불평을 하시기에 큰 맘 먹고 무스탕 재킷을 사드리려 백화점에 모시고 갔다. 그날 난 밍크코트를 결제했고 그해 내내 카드 할부를 결제했다.

손가락이 허전해 동창회 나갈 때 부끄럽다는 시어머니의 불평에 루비 반지를 해드리려다 다이아 세트 값을 내야 했다. 남편 말이 옳았다. 시~월드가 씨~월드가 돼가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태도를 바꾸었다. 제삿날 퇴근 후 종종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시댁을 갔고, 양손에 비닐 봉지 대신 간단한 봉투를 준비했다. 제사 후 팔 걷어붙이고 뒷정리를 하고 12시 넘어 귀가하던 것을 멈췄다.

다음날 몸살 안 날 정도로 일했고, 출근을 걱정하는 시부모님이 등 떠밀 때는 감사히 신발을 신었다. 전업주부인 손위 동서에게도 덜 미안해했고 회사 일이 겹치면 가끔은 제사나 대소사에 불참도 했다.

시부모님은 나에 대한 처음의 기대 수준을 서서히 낮추기 시작했고 얼마지 않아 둘째 며느리의 잠깐의 ‘얼굴 비침’이나 심지어 부재까지도 당연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나를 항상 걱정해 주신다.

한참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 나는 시어머니와 대화 중 “제가 좋은 며느리는 아니었지요”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슨 소리. 그만하면 잘했지”라고 진심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무 약았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봐도 신혼의 초심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때 최선을 다했다면 한번 올라간 시댁의 기대는 점점 더 올라갔을 것이고 내가 같은 정도의 성의를 보였어도 만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직장에 육아에 서서히 지쳐 갔을 것이다. 나는 못된 며느리가 되어 있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양쪽 다 만족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처음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는 나를 지켰다. 워킹맘으로서 내가 제일 잘한 부분이다.

시월드뿐만이 아니다.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는 말자. 끝까지 지속할 자신이 없다면 말이다.

특히 시월드의 구성원들은 며느리들의 최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 내가 시어머니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초기의 나의 배려와 희생이 시간이 지나면 시월드의 당연한 권리로 둔갑한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수백 년을 거치면서 우리 뇌에 새겨진 신경망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시월드와의 관계는 보다 전략적일 필요가 있다. 사람관계에서 진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세계는 좀 다르다. 딸 같은 며느리, 친정어머니와 같은 시어머니는 세상에 없다.

처음부터 부족함을 드러내자. 동동거리며 완벽을 추구하지 말자. 아플 땐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쉬자. 못하는 건 어머니가 해 달라고 요청하자. 시어머니에게 일하는 며느리의 애로를 토로하자. 힘들고 서운함을 그때그때, 살짝살짝 표현하자. 아니면 다 늦게 폭발하고 심하면 등 돌리게 된다.

차례를 마친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더 자고 가라는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아니에요. 어머니. 저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 밥도 먹고 싶고요. 고모처럼요.”

다소 당황해 하는 시월드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남편을 향해 돌아서자. 두 눈엔 힘을 빡~주고 목소리는 경쾌하게 외치자. “가즈아 애들아. 여보. 자동차 키 챙겼어요.”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실 시어머니에게 말하고 싶다. “어머니, 저는 원하시는 것 기탄없이 요구하시고 뒤끝 없는 어머니가 좋아요.” 이 말은 진심이다. 나에게 선택하라면, 내 자식을 길러주시면서도 원하는 것을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시고 무조건 사양만 했던 친정어머니보다 시어머니의 삶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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