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 안정훈의 아날로그 세계일주(1)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안정훈 전 공군 정훈감(준장)

지공거사는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경로우대증이 나오는 65세 이상의 노년을 일컫는 은어다.

지공거사가 되면 BMW족 대열에 끼게 된다. BMW는 Bus, Metro, Walking의 줄임말이다. 자가용도 필요 없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거나 걷게 되는 나이다.

정부는 노인 운전자들의 사고가 잦아지자 운전 면허증 반납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돈 몇 푼 주고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라고 한다.

나도 운전을 안 한 지 꽤 오래됐다. 인지 판단력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고속도로 주행이나 야간 운전 또는 눈, 비 등 날씨가 안 좋은 때 운전을 하면 눈의 피로가 빠르게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 주행 차량이 곧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반납은 사양했다.

지공이 되면 황혼의 사춘기를 치르게 된다. 사추기라고도 표현한다. 봄이 가고 가을이 온 것이다. 옛날 같으면 환갑이 인생의 분기점이었지만 이제는 경로 우대증을 받으면 그때 자기의 인생을 심각하게 되돌아 보는 변곡점이 된다.

지금은 노인이라는 말 대신 장년이라고 표현한다. 혹은 ‘액티브 시니어’라고 그럴듯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건 립 서비스다. 그냥 할아버지가 맞다.

할아버지의 어원은 ‘하얀 머리의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손주를 보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다. 내가 진짜 할아버지가 된 거야?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외쳐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옛날엔 자존심과 자부심, 성취욕과 보람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 등의 문제로 힘들었다. 할아버지가 되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프다고 아우성친다.

젊은 사람은 마음이 아파서 힘들어하고 나이 든 사람은 몸이 아파서 힘들어한다. 몸이 아프면 가슴이 아픈 사람이 멋있어 보이고 부러워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80세가 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원과 친구 하면서 연명하는 삶이다. 대부분은 건강 수명이 70세 까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50년이 지나면 대체로 70살이 된다. 그때 졸업 5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치른다. 왜냐하면, 그다음에 동창회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치 최후의 만찬 같은 행사다.

얼마 전 명문 K고는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로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모아둔 회비를 헐어 럭셔리하게 즐겼다. 회비 모아 봤자 앞으로 뜻깊게 쓸 기회가 별로 없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우리도 곧 50주년을 맞기에 관심이 컸다. 동창들은 참 현명한 판단이라고 입을 모았다.

여러 가지 긴 이야기를 했는데 정리해 보자. 60세에 퇴직한다면 10년 정도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간이다. 퇴직하고 몇 년은 더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65세가 넘으면 자영업자, 정치인, 의사, 변호사 같은 부류가 아니면 확실하게 은퇴하게 된다.

특히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사의 임직원, 그리고 선생님, 경찰, 군인 등등 연금족들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온실 속의 화초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퇴직하는 순간 소속감이 상실되고 후배들의 시선도 달라진다. 주변 사람들의 눈길도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

일반인들은 평생 열심히 일하고 세금 바친 자기의 국민연금은 쥐꼬리만 한데 공무원 퇴직자들은 죽을 때까지 고액의 연금을 받는다며 비난을 쏟아낸다. 겉으로는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는 적개심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고 해명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냥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라고 말하면 된다. 국회에 나가 대정부 질문에 대해 답변할 때처럼 낮은 톤으로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고 넘어가는 게 좋다.

공무원 퇴직자들은 아무래도 사회 적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생 2막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일반 사회인들보다 미리 설계하고 준비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내 경우는 55세에 퇴직했다. 그리고 10년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반은퇴자로 살았다. 욕심을 내면 조금 더 일할 수도 있었지만, 건강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끝은 대개 비슷하다. 병들거나 아프다.

나도 고도 비만에 고혈압, 당뇨, 고콜레스테롤, 방광염, 과민성 대장염 등등과 나쁜 부랄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도 매일 폭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병원 처방약은 빠뜨리지 않고 먹었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번 아웃이 찾아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탈출구를 찾기로 했다.

인생을 낭비한 죄를 저지른 빠삐용이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하듯이 나도 현실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다.

빠삐용은 프랑스 말로 나비라는 뜻이다. 나비는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걸 믿었다. 만 65세가 되던 해에 나는 빠삐용이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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