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繪事後素). 먼저 바탕을 손질한 후에 그림을 그린다. 사람은 좋은 바탕이 있은 뒤에 형식(禮度)을 더해야 한다. 예(禮)보다는 그 예의 본질인 인(仁)한 마음이 중요하다.’공자와 그의 제자인 자하의 문답을 읽고 있자니 의문이 생긴다. 그럼 어진 성품이 아닌 사람은 평생 예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인가? 형식적인 예를 갖춤으로써 인을 채워가는 부분도 있지 않은가. 늦어도 학령기가 되면 예를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공부는 왜 하는가? 내면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형식도 갖추어야 한다. 어느
얼마 전 아들과 함께 ‘탑건2 매버릭’ 영화를 보러 갔다. ‘탑건’을 본 것이 35년 전이었는데 이렇게 아들하고 후속작을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탑건’에서 내가 느꼈던 감동을 아들도 ‘탑건2’에서 공감했다니 세대를 아우르는 명화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1986년 미국에서 개봉했고, 1987년에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으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속에서 펼쳐진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몇몇 장면 때문이다. 과연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언제나 마음은 청춘이 영화의 첫 번째 매력은 무
34년의 회사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했다. 먼저 제대한 남편은 이제는 같이 놀 수 있다며 기대에 찬 눈치였다. 그동안은 남편과 같이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하루 두세 시간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24시간 붙어 있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큰 변화였다.퇴직 직전 시작된 팬데믹으로 고대했던 여행도 불가능했다. 퇴직 후 반짝 찾아오는 두 번째 허니문도 없던 것이다.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면서 편안함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간 서로 얼핏 봤던 모습들이 코앞에서 보였다. 아니, 이제 퇴직해 쉬려 하는데 끼니는 왜 나만
“제발 좀 빨리해요. 어이구, 속 터져.”무엇을 해도 느릿느릿한 나를 보고 남편은 불평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도 좀 빠릿빠릿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단지 속도가 느릴 뿐 무엇인가 하고는 있으니 남편은 못마땅해도 기다려 주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느린 것도 많이 빨라졌다. 반복으로 숙련이 되어 그런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도 느린 편이다.느린 사람을 보고 ‘황소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황소가 논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서 농토를 일구는 것을 보면, 많은 동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보는 오로지
지난 5월 10일은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식을 한 날이다. 그리고 취임식 도중 깜짝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바로 청와대가 74년 만에 국민에게 개방된 장면이었다. 그동안 청와대는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서 구중궁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삼엄한 경비로 일반 국민들은 접근이 매우 어려웠으며 가끔 벌어지는 불심검문 때문에 주변조차 마음 편히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러던 청와대 대문이 활짝 열린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어느새 서울을 대표하는 볼거리로 탈바꿈했다. 청와대 관람 방문객 수가 지난 6월 9일 기준 77만여 명이라는 수치가 이를 증명
다섯 번째는 국민연금이다. 때가 된다고 당연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연금수령 3년전의 월평균소득이 일정액을 넘으면 (기준은 근로자의 평균소득이다. 약 270만원 조금 못된다.) 넘는 금액에 따라 연금액이 최대 반이나 감액된다. 장장 5년까지. 게다가 소득별로 어떤 것은 100%, 어떤 것은 30% 계산이 되니 이것도 알아야 한다.연금수령 3년전부터 평균소득을 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퇴직 후 차린 치킨집이 너무 잘되면 연금이 절반이나 깎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대박 난 치킨집을 정리한다고? 노노! 이럴 땐 연금수령시
우리 모두는 삶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듯이 조직에 있는 우리 또한 퇴직의 그 날을 향해 가고 있다.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처럼 마냥 회사에 다니고 돈벌이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나이가 들고 직급이 높을수록 회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은 다가오는데 우리는 그 순간을 애써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생활한다. 아니, 앞만 보며 여느 때보다 맹렬히 질주한다.그러다 어느 날 퇴사가 결정되면 팽팽한 고무줄이 탁 끊어지면서 질주를 멈춘다.그리곤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린다. 무엇을 해야지? 무얼 알아야 하나? 회사밖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중략)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하략)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의 하나다. 그래서 가끔 필사(筆寫)도 한다.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작은 연적(硯滴)을 하나 가지고 다닌다. 그것
지난 3월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현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협의를 통해 관련 시설 등을 단계적으로 이전하는 방안에 대해 합의했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일인 5월 10일부터 국방부 내의 집무실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어서 본격적인 용산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용산은 개인적으로도 군 생활의 시작과 끝을 마친 곳이라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용산의 모습은 어땠을까?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돌아가는 삼각지는 없다용산 삼각지역에서
“네, 경산시 보건솝니다. 선생님, 코로나 확진되셨어요. 오늘부터 일주일간 집밖으로 나가시면 안 돼요.”아침 8시 반에 출근하니까 벌써 헤드셋을 끼고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여기는 콜센터처럼 모두 헤드셋을 쓴다. 수화기를 들고 전화하는 단계는 하마 예전에 넘었다).“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하고 바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선생님, 어제 넘어온 확진자 명단 보냈어요. 201번부터 300번까지 해주시면 됩니다.” 탕비실에 가서 내려진 커피를 한 잔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한 모금씩 홀짝이며 곧바로 작업을 시작한다.주민번호,
예로부터 전쟁은 영토를 맞대고 있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가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해온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과 수많은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이 발발하고 있고 이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이번 러시아의 침공이 전 세계인의 축제인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과연 국격(國格)은 국력에 비례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올림픽 개최국의 국격 지난해
돌림병으로 붓을 놓은 지 두 해가 다 되어 간다. 매주 드나들던 초등학교 서실(書室)도 폐쇄되고 선생님의 자택 서실로 찾아가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으니 별수 없다. 필연(筆硯)과의 인연을 이어갈 단초를 찾는 마음으로 곰곰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르던 통의동 화랑(畵廊) 관장님께 연락해보는 것이 나을 듯했다.통의동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년) 선생이 12세 때부터 관직생활을 하던 당시까지 고향인 예산보다 더 오래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그러니 오롯한 서예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런
바야흐로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의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디지털 기술로 인해 우리 사회의 전 분야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2020년 초에 발생한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메타버스 등 디지털 시대를 규정하는 용어의 구체적인 개념도 이해하기 어렵다. 변화의 시대에 준비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국가 전반의 운영에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한 정부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기업과 정부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조직의 형태와 운
연말 인사이동에서 퇴직한 여성후배 A를 만났다. 가까운 사이라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깔끔한 친구였다.퇴직 때문일까? 그간 버티고 있던 마음의 벽이 느슨해졌는지 처음으로 남편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50대 초반 퇴직 후 근 10년이 넘게 집에 있단다. 그동안 본인 출근하느라 크게 거슬리지 않았고 가정경제도 본인 몫으로 생각하고 있던지라 별문제는 없었다.근데 퇴직 후 집안에 둘이 있다 보니 남편의 일거수가 점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흔히 보는 퇴직한 가장의 집안 풍경이다. 남녀가 바뀌었을 뿐이다.“그럼, 부군은 낮 동안 어떻
매년 돌아오는 새해인데 올해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내 인생에서 회갑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미와 더불어 올 한해는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해다. 바로 3월 9일에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통령을 뽑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60여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대에서도 대선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바로 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군인들은 과연 대통령 후보자와 대선 공약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고 있을까?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전단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방과후 교실에서 성인반을 모집한다는 홍보용 전단지였다.과목은 서예. 나는 평소 서예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이들과 뒤섞여 아옹다옹하면서까지 배울 생각은 없었다. 결국, 전단지는 파지가 되어 버려지고 말았다.그로부터 석 달 뒤 딸아이는 같은 전단지를 또 나에게 들이밀었다. 이번엔 수업료가 5000원이 올랐다. 다만, 5000원어치라도 아이들 수업과는 다른 게 있겠지 싶어 신청해 보기로 하였다. 딸의 ‘강추’도 거절할 수 없
2021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삼백예순날마다 어김없이 되풀이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착잡한 마음인 건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근무지를 옮긴 분, 이사를 하신 분, 승진을 하신 분, 상을 받으신 분들이 있다면 근무지를 못 옮긴 분, 이사를 못 하신 분, 승진을 못 하신 분, 상을 못 받으신 분들이 (어쩌면 훨씬 더 많이) 있으시겠죠. 어떤 분에게는 소중한 인연을 만든 해일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소중한 분을 떠나보낸 해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또 한 살 더 먹었네” 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요. 모든 분들
직장생활 4년차인 딸아이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선배는 연초 내내 놀다시피 하다가 하반기에 반짝 일을 하더라고. 그리고 고과는 최고점을 받았어. 뭐야 이게? 나도 그래야 되나?” 순간 나는 남이 보든 안 보든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등의 뻔한 이야기를 하려다 말을 삼켰다.“글쎄. 그 선배는 참 경제적으로 일을 하는구나.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사 입장에서는 평가 철에 반짝 일을 하는 사람에게 눈이 가기는 하지. 그게 사람의 기억의 한계야. 가까운 과거에 더 영향을 받는 것 말이지.”주위의 여성후배들이 겪는 빠질
퇴직 후에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소개를 할 때면 이렇게 말한다. “전에는 군인이었고 현재는 시인으로 활동하는 이서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는다.“어떻게 군인이 시인이 될 생각을 하셨어요?” 그럼 나는 냉큼 이렇게 대답한다. “네. 이순신 장군도 시인이었고 남이 장군도 시인이셨어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시를 남기셨고요.” 그러면 이내 “아! 맞아요. 문무겸비….”한다. 우뇌를 개발하라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명령과 복종, 규율과 질서, 책임과 의무가 우선시되는 군대에서 문화는 왜 필요한 것일까.며칠 전 모임에서
첫 출근 때 만났던 상사는 이제 생각해 보니 전형적인 ‘똑부’(똑똑+부지런함)였다.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쉼 없이 일하였다. 지시가 떨어진 일은 물론이고 그 외의 일도 앞질러서 찾아 했다. 목표치도 높아 거기까지 도달하면 즉시 한 단계 높였다.물론 나는 많이 배웠고 이후의 직장생활은 단단해졌다.이후 수십 년이 흘러 더 센 똑부를 만났다. 그는 작은 일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전체를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도 지녔다. 그의 책상에는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주말에 퇴근할 때는 가방이 터지도록 자료를 한가득 싸 들고 갔다.물